Part 1. 슬롯존들의 위대한 출근(feat. 경기 슬롯존)
하루의 시작과 끝은 늘 험난한 법
모든 오피서들에게 매일의 시작은 출근이다. 하루의 마감은 퇴근이다.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은 공평하다. 다만 길바닥에서 보내는 시간이 공평하지 않을 뿐이다.
"어디 사세요?"
"서울이요!"
끝났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된다.
다들 알아듣는다. 외국인이어도 통한다.
반면 "경기도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무 넓어서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슬롯존간다.
"아.. 그 신도시 쪽은 아니구요. 신도시 같긴 한데, 미사 강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초맹 라이프 시티 지구라고 하는.. 음 그러니까.. 옛날 초맹동 있는 거기인데.."
그렇다. 겁나 구차해진다. 말이 길어진다. 말이 길어진다는 것은 아쉽다는 거다. 설명이 많아진다는 것은 쫄린다는 거다. 그들은 어디 사는지 알려주기 싫은 게 아니다. 말해도 모르기 때문에 배려하는 것이다.
슬롯존들에게 출퇴근 이동 시간은 중요하다. 매일 겪어야 한다. 하루의 피로감이 다르다.
출퇴근이 30분 이내면 집 근처라 표현한다. 1슬롯존 이내면 적당하다 느낀다. 1슬롯존 넘어가면 먼 거다. 1슬롯존 반이 넘으면 주변에서 불쌍하게 쳐다본다. 2슬롯존 넘어가면 서울을 싫어하고 경기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2시간 반 언저리에서 보통 슬롯존마다 누가 '길바닥 최강 대장 오피서'인지가 결정 난다. 이쯤 되면 반 미쳐서, 가까운 이들을 부러워하다가 곧 서로 경쟁한다. 난 2시간 30분! 난 2시간 40분! 내가 더 머네. 니가 더 머네. 나의 하루는 험난 그 자체다. 내가 제일 불행하다. 이런 거로 싸운다. 타이틀 매치란 그런 것이다. 서울 오피서들은 팝콘을 먹으며 경기 오피서들의 길바닥 승부를 즐길 뿐이다.
경기 오피서는 하루의 20%를 자는데 쓰고 20%를 길바닥에서 보낸다. 그리고 40%를 슬롯존에서 보낸다. 여기까지 총 80%. 온전히 누리는 자유시간 20% 남았다고? 아니다. 그 20% 중 10%는 살기 위해 먹는데 쓰고, 마지막 10%는 저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데 쓴다. 누릴 수 있는 건 없다. 당연히 쏘울 수치는 바닥을 친다.
초맹의 출근 체력 감소 법칙
공식 : 출근 시간이 증가할수록 30분 단위로 HP는 10%씩 감소
1. 30분 : HP 90% (-10%)
2. 1슬롯존 : HP 80% (-20%)
3. 1슬롯존 30분 : HP 70% (-30%)
4. 2슬롯존 : HP 60% (-40%)
5. 2슬롯존 30분 : HP 50% (-50%)
경기 슬롯존는 해뜨기 전부터 짐을 싼다. 일단 짐이 많다. 날씨에 예민하다. 애매하면 우산이든 뭐든 챙겨 넣는다.
걸어간다. 빌리지 버스를 탄다. 내린다. 어느 버스 정류장. 이미 줄이 길다. 광역 버스 이건 올 생각을 안 한다. 아. 왔다. 타려고 하면 자리 꽉 찼다. "아저씨! 입석할께요!" 안 된단다. 위험하대나 뭐래나? 버스가 와도 3명밖에 못 탄다. 결국 눈앞에서 한 대 보내고 또 기다린다. 문득 챙겨 온 짐을 확인한다. 아. 맞다. 휴대폰 배터리. 놓고 왔다. 어쩌지? 다시 갔다 오자니 이거 안 봐도 지각이다. 모르겠다. 그냥 가자.
간신히 탄 다음 버스. 비어 있는 자리에 낑겨 앉는다. 옆에 쩍벌 돼지가 자고 있다. 짜증 나. 좁다. 어쩔 수 없다. 공손자세로 엉덩이 끝만 붙여 앉아 버틴다. 버스가 흔들린다. 괜찮다. 같이 몸도 맞춰 흔들려준다. 이래야 충격이 덜하다. 어느 정도 갔을까? 내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서브웨이에 도착한다. 여기서 심호흡 한번 해 준다. 지하철을 탄다. 자리는 없다. 한참 간다. 여기다! 내리자. 다 왔냐구? 아니다. 갈아타자. 사람들이 뛴다. 열차 오고 있나? 모르겠다. 일단 같이 뛴다. 환승은 남들과 속도를 맞춰줘야 부딪치지 않는다. 교통 흐름과도 같은 거다.
남들 뛰는데 혼자 걷고 있으면? 뒤에서 누군가 부딪친다. 추돌 사고다. 부딪치는 넘은 꼭 덩치가 크다. 사과 그런 건 없다. 이 바닥에서 사과를 하며 예의를 차리는 그런 문화는 없다. 잠시 멈칫하고는 다시 지하철 환승을 향해 돌진한다. 아주 저돌적이다. 지하철에다 모닝 김밥이라도 숨겨놨나?
열심히 뛰고도 바로 눈앞에서 지하철 문이 닫혔을 때의 기분은 처참하다. 안에 있는 사람은 삐에로 마냥 날 보며 씩 웃고는 승리의 표정을 짓는다. 킹 받는다. 결국 눈앞에서 환승을 놓치고, 다음 지하철을 탄다.
이들은 대중교통에서 머리 말고 화장하고 잠도 자고 공부도 하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 자리 없으면 어떻게 하냐구? 괜찮다. 경기 슬롯존를 뭐로 보는 거냐? 서서도 다 할 수 있다. 앉아서 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사치다. 자다가도 내릴 역이 되면 기가 막히게 일어난다. 이쯤 된 거 같은데 내지는 꿈에서 누가 깨워준다. 그럼 딱 내릴 역 맞다.
지하철은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인다. 오리지널 라인 말고 꼬마 지하철이면 혼잡과 낑김은 극대화된다. 이때는 몸에 힘을 빼고 뒷사람에게 편하게 기댄다는 생각으로 있는 게 더 편하다. 다만 이따금 발생하는 에어컨 고장 같은 일이 벌어지면 지옥이 펼쳐진다. 내리고 싶지만 출근을 생각하면 내리지 못한다. 쉰내가 진동한다. 덥다. 땀이 비 온다. 그럼에도 안내 방송은 무성의하고 무미건조하다. 승객분들의 양해를 바란댄다. 끝. 지하철이 퍼져도 마찬가지다. 그냥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랜다. 끝. 진짜 그게 다다.
역 밖으로 나와보면 모든 갈길 잃은 슬롯존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하나같이 폰을 붙잡고 있다. "팀장님. 지하철이 고장 나서 늦을 거 같아요. 빨리 가겠습니다." 지가 말하면서도 어떻게 빨리 가야 할지 모른다.
지하철에서 사람들 어깨 좀 부딪치고 손으로 밀치고 하는 건 매일 겪는 일이다. 근데 그걸 뭐라고 하면 속 좁은 넘이 된다. 출퇴근 지하철. 그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통용된다. 내릴 역이 다가오면 단전에 기를 모은다. 안내방송이 나올 때쯤 나 내린다는 알짱거림을 한번 기웃거려 주고. 문이 열리는 그 짧은 찰나, 젖 먹던 힘을 순간적으로 짜낸다. 앞을 꽉 막은 사람들을 밀어재끼고 몸을 비틀어 비집고 나간다. 내릴 때까지는 숨을 참아야 한다. 배를 조금이라도 넣어줘야 내릴 수 있다. 힘겹게 내려서 또 걸어간다. 슬롯존스 성지. 그곳을 향해..
도착이다. 출근 도장은 생각보다 험난하게 찍힌다. 너덜너덜하다. 이미 몰골은 말이 아니다. HP의 반이 날라갔다. 10시까지 카페인을 보충하며 앉아서 메일도 보고 할 일을 체크하지만, 실은 그게 아니다. 그냥 쉬는 거다. 아침은 언제 먹냐구? 경기 오피서는 아침을 먹지 않는다. 하루 세끼는 사치다. 허기지면 구운 계란이 있다. 편의점에서 산 그 삼각김밥? 그건 아침이 아니다. 점심용이다. 아침에 샀다고 다 아침식사가 아니다.
오피스 출근 순위를 보면 늘 원탑부터 상위권에는 경기 오피서들이 포진한다. 쟤들은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일까? 집도 멀다며? 부지런한 거야? 아님 슬롯존를 사랑하는 거야? 아니다.
버스가 오는 타이밍, 지하철 오는 타이밍, 환승 타이밍 이 타이밍의 아다리가 삼위일체되는 기가 막힌 날들이 있다. 평소 2슬롯존 넘는 거리가 이때 30분 이상 단축된다. 이를 현진건은 운수 좋은 날이라고 한 바 있다. 반대로 머피의 데이로 아다리가 무너지는 날에는 평소보다 30분 넘게 밀리는 거다. 이때는 2슬롯존에서 2슬롯존 반이 된다. 그래서 그냥 일찍 도착하는 것이다.
보통 5분, 10분 지각하는 사람은 대개 서울 슬롯존다. 이들은 평소 8시 50분 컷이다. 늦잠 자거나 한눈팔면 지각이다. 반면 경기 슬롯존는 지각을 해도 30분이나 1시간 단위로 한다. 경기 슬롯존의 지각은 중간에 지하철 철로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눈앞에서 버스를 놓쳤거나 이런 경우다. 이때 1시간 내로 갈 수 있겠는지 없겠는지 각을 먼저 본다. 그리고 2시간 지각이 될 것 같다거나, 늦잠을 자버렸다 싶으면 바로 포기한다. 그냥 쿨하게 반차나 연차를 지르는 게 속 편하다. 말도 안 되는 물리적 거리 앞에 애써 모험을 걸지 않는다.
눈이나 비가 온다고 하면 출근에 1시간을 더하고 시작한다. 자차 끌면 되지 않냐구? 길막에 기름값에 그게 그거다. 자고로 서울은 자차로 들어가는 게 아니다. 출발할 때 30분 차이가, 도착할 때는 1시간 넘게 벌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모든 라디오의 애청자는 경기 오피서 자차족들이다. 웬만한 라디오 광고는 다 외우며 같이 흥얼거린다.
"아무도 거기 가서 살라고 등 떠밀지 않았습니다!"
"알아! 안다구! 그래서 그냥 닥치고 다니는 거잖아!"
그렇다. 그걸 누가 모를까? 대부분 오피스 성지가 서울 바닥에 몰려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 근처에 살면 가장 쉽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돈이다. 돈이 문제다. 그 돈을 누가 퍼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슬롯존가 된 이상 손을 벌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도 시작되는 슬롯존스의 아침.
모두가 같은 일상을 시작하는 것 같지만, 경기 슬롯존들은 체력이 반토막난 상태로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기에 그들은 말하지 않는다. 누구를 탓하지 않는다. 다만, 경기 슬롯존들의 게임은 조용하게 소리 없이 시작될 뿐이다.
경기 슬롯존들에게 전쟁터는 회사만이 아니다.
집 밖은 모두 지옥이다. 이불 밖은 다 위험하다.
주중의 일상을 포기하고 주말에 올인하는 이들.
그들의 험난한 출근을 알아주지 않는 슬롯존는 차갑다.
그러나 그들이 시작하는 아침은 소리 없이 강하다.
P.S. 하여 오늘도 시작해 보자. 경기 슬롯존들아!
경기 오피서가 길바닥에서 잃기 좋은 책 : 슬롯존스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