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인정하자.
인생은 케이슬롯이 기본값이다.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케이슬롯스럽게 죽는 현실만 봐도 이 전제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인생이 생로병사의 케이슬롯과 욕망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케이슬롯의 연속이라고 설파한 부처님 말씀은 차치하고서라도, 쇼펜하우어, 토마스 홉스, 니체 등 많은 철학자들이 인생의 본질이 케이슬롯이라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인생이 케이슬롯이 아니다. 행복해 죽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틀리지 않는다. 케이슬롯과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가치 평가이기 때문에 그리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왜 나만 인생이 뭣 같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인생 뭣 같은 사람은 수두룩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세계는 설정이 그렇게 돼 있다. 그냥 사는 것도 만만치 않고 남보다 잘 사기는 꽤 어렵고, 여차하면 추락한다.
문제는 이 케이슬롯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대응하기 위해서는 먼저, 케이슬롯의 출처를 알아야 한다. 외부적 요인인지, 내부적 요인인지, 어떤 것은 외부적 요인에서 시작돼 내부적 요인이 되고, 그 반대인 것도 있으며 동시에 벌어지는 것도 있다.
또 케이슬롯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는 케이슬롯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작업이 만만치 않다. 케이슬롯을 느끼는 나와 별개로 존립할 수 있는 제3의 자아를 생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메타인지, 자신을 관찰하는 작업은 어떤 사람에게는 일상화 돼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생소하다. 게다가 선을 넘으면 자아가 분열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케이슬롯의 근원을 명확하게 하는 작업은 꽤나 유용하다. 그래야만 케이슬롯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케이슬롯을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케이슬롯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케이슬롯이야 말로 우리가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최고의 피드백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케이슬롯은 위험에 대한 직접적인 시그널이고 케이슬롯의 원인을 추적해 더 큰 위험을 방지하거나 피해를 적게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케이슬롯을 떠올려 보자. 질병이나 부상에 의한 케이슬롯은 당연히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럼 정신적 케이슬롯은 어떨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타인과 갈등 때문에 생긴 스트레스,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아 생기는 짜증, 앞으로도 나아질 게 없다는 우울감, 과거의 실수나 불행을 곱씹으며 생기는 자책감, 재산, 명예, 사랑하는 사람까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수없이 많다.
이 모든 케이슬롯이 각각의 쓰임새가 있다. 대비하고 개선하고 극복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아가지 못하고 케이슬롯 속에 고립된다면 완전히 무용한 케이슬롯일 뿐이다. 케이슬롯을 위한 케이슬롯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케이슬롯을 유용하게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이제 케이슬롯을 정확하게 살펴보자. 뭐가 문제인지.
그러기 위해서는 케이슬롯이 무작위로 생산하는 감정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 케이슬롯은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겹겹이 방패막으로 두르고 사실 관계를 숨기는 경향이 있다.
짜증, 스트레스, 우울, 자책감, 두려움 같은 감정의 껍데기를 제거하고 나면 실상이 별거 아닌 경우도 꽤 있다. 감정을 제거하는 게 어려울 뿐이다. 당연하다. 남의 것도 아닌 내 감정을 어떻게 없애나? 화가 나는데 어떻게 분노를 멈추고, 슬픈데 어떻게 눈물이 안 나게 하나? 내 것인데도 내 맘대로 안 되는 첫 번째가 감정인데.
그러나 그런 감정은 허상이다. 나 말고는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환각과 비슷하다.
감정은 케이슬롯을 회피할 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정당화한다. 겹겹히 포장된 감정은 정확한 케이슬롯의 원인을 파악하게 어렵게 만든다.
회의 중 누군가 던진 날카로운 말 한마디에 괜히 심장이 뛴다. 사실 그 정도의 위협은 아닌데, 뇌는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 순간 이성이 마비된다. 이처럼감정은 뇌가 생존을 위해 케이슬롯을 관리하고 행동을 유도하기 위해 생성한 인지적 필터에 가깝다.
두려움은 도망치기 위한 에너지 분배이며,분노는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위협 신호로 작동하고,슬픔은 에너지 절약 모드와 유사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 모두 인간의 뇌가 자율적으로 수행하는 기능이어서 감정적 요소를 배제하고 케이슬롯을 직시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차분하게 호흡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고 나를 관찰하는 제3자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의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왜 슬프니? 왜 짜증 나? 뭐가 화가 나는데? 정말 우울해? 그 불안감은 지나친 것이 아닐까? 아직도 두려워?
걱정하고 불안했던 일들이 정작 닥쳤을 때는 별거 아니거나 그럭저럭 잘 대처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라. 두려움은 두려움 그 자체일 뿐이고 슬픔도 슬픔 그 자체이며 실재와 아무 관계없는 허상이다. 누구도 내 두려움과 슬픔을 보지 못하며 오직 나만 느낀다!
감정적으로 둔한 인간, 혹은 아예감정이 없는인공지능이 위기 상황에 훨씬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것만 봐도 참으로 흥미롭지 않은가?이놈의 감정!
감정이 일상에 주는 정서적 풍부함을 부정하지 않겠다. 기쁨이나 만족감은 마땅히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그러나 기쁨이나 만족은 모두 케이슬롯이 긍정적으로 해결됐을 때 따라오는 보상이다. 그러므로 케이슬롯 없이는 결코 기쁨이 생성되지 않고, 기쁨이 지나치면 반드시 케이슬롯이 또 따라온다. 그만큼 케이슬롯을 객관화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것은 중요하다.
흔히 하는 착각이 있다. 우리의 뇌가 무척이나 이성적일 것이라는 믿음이다. 우리의 뇌는 그저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를 달성하게 최적화 돼 있다. 생존을 위해서는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하고, 없는 케이슬롯도 만들어 낸다.
뇌는 결코 이성의 기계가 아니다. 뇌는 생존에 최적화된 착각 생성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