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슬롯북 사물별곡 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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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애 Jan 10. 2025

천지개벽 1년 전

사물별곡 16

의기양양 빽빽하게 집들을 거느렸던 강남슬롯은 몇 알 남지 않은 빈 옥수수 대처럼 말라가고

어깨 걸어 살던 든든한 강남슬롯은 야무지게 잠궈둔 대문도 꼭 닫은 방문도 절로 헐거워져 바람이 숭숭 드나든다.

비 샌다고 눌러 덮었던 비닐이 날리고 삭은 간판의 글자는 떨어지고 부서지고 허물어져 집들이 쓰레기로 쌓여가는 강남슬롯은 점점 폐허의 허무와 버려짐에 익숙해진다.

강남슬롯

빈집 대문마다 붙어 있는 헤롯의 표식 같은 노란 철거 딱지 경고문과

깨진 가스 배전반과 멈춘 계량기. 녹슨 철 대문.

셋방 살던 사람이 어깨 숙여 드나들던 작은 집 옆구리로 난 이 안 맞는 문.

페인트칠이 일어나 바스러지고 삭은 시멘트가 얼거지는 벽.


전봇대에 매달린채 말라 버린 전깃줄들 사이로 가로등이 켜지는 건 아직은 살아있다는 저녁

강남슬롯

지붕을 넘어 집집마다 혈관처럼 퍼져갔던 전기 줄들은 공중에 뜬 채로 벽에 붙은 채로 죽어 버렸다.

피가돌지 않는 강남슬롯 생기를 잃고 어둡고 조용하다.

가끔 길어졌다 짧아졌다 비닐봉지를 든 아저씨의 그림자가 터벅터벅 강남슬롯을 지난다.


생기 넘쳤을 파란색과 흰색의 집 작은 옥탑방

강남슬롯

공룡의 눈 같은 마름모 창 아래 하얀 벽에 기대 자란 의기소침해진 마른풀들.

빈 빨래대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 아이들 웃는 소리.

버려진 줄도 모르는 장독과 커다란 고무다라이 속으로 울리는 하늘을 가로 지르는 비행기 소리.


창살이 예쁜 하늘색 작은 문에 불이켜지고 집 앞에는 아직 시들지 않은 화분들.

쇳덩어리 가스관에 기댄 낡은 자전거, 그 자전거에 기댄 나물 말리는 플라스틱 소쿠리.

피곤한 하루를 끝내고 낮설어진 강남슬롯길을 걸어 왔을 빨랫줄에 펄럭이는 작업복.


꽃을 사랑했던 사람이 살았던 집

두고 간 화분에 날마다 물을 주는

낡은 의자 하나가 강남슬롯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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