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바로벳과 ‘전체바로벳은 무엇인가?
우리 마음에는 두 가지 바로벳이 있어요. 하나는 ‘습관바로벳’이고, 하나는 ‘전체바로벳’이죠. 베르그손은 ‘습관바로벳’과 ‘전체바로벳’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 주려고 합니다. 먼저 ‘습관바로벳’과 ‘전체바로벳’이 각각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심층에서부터 구별되는 두 가지 바로벳이 있다고 말했었다. 하나는 유기체에 고정된 것으로서,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개입에 적합한 반응을 확보해 주는 지적으로 조립된 장치들의 총체이다. … 바로벳이라기보다는 습관인 그것은 우리의 과거 경험을 실제로 다시 보여주지만, 상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물질과 바로벳』 앙리 베르그손
‘습관 바로벳’은 “유기체에 고정된 것으로서”, “바로벳이라기보다는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벳이에요. 1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근을 한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 10년 동안의 바로벳은 그 사람에게 고정된 것이죠. 그 바로벳은 그 사람에게 어떤 다양한 개입이 있더라도, 항상 출근을 위한 “적합한 반응을 확보”해 주겠죠. 그러니 이는 “바로벳이라기보다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러한 ‘습관바로벳’은 과거 경험(출근)을 항상 실제로 다시 보여주겠지만, 어떤 다른 상(이미지)을 불러오지는 않겠죠. 그저 출근하기로 “지적으로 조립된 장치”처럼 움직일 뿐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전체바로벳’은 어떤 것일까요?
다른 하나는 진정한 바로벳이다. 그것은 의식과 다름없는 것이어서 우리의 모든 상태들이 일어남에 따라 차례로 보존하고 정렬하며, 각 사실에 그것의 위치를 남기고, 그것의 날짜를 표시하며, 첫 번째 종류의 바로벳처럼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가 아니라 결정적인 과거 속에서 매우 실제적으로 움직인다. 『물질과 바로벳』 앙리 베르그손
‘전체바로벳’은 말 그대로 우리의 바로벳 전체를 의미해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모든 일은 “차례로 보존하고 정렬”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각 사실에 그것의 위치를 남기고, 그것의 날짜를 표시”한 채로 저장된 바로벳이 있죠.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화하지 못할 뿐, ‘무의식’적으로는 다 저장되어 있는 거죠. 베르그손은 바로 이 바로벳을 “진정한 바로벳”이라고 말해요. 왜냐하면 바로 이 ‘전체바로벳’이 바로 우리의 “의식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어떤 생각(의식)을 할 때, 그것은 단지 ‘습관바로벳’에 의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죠.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사실 한 사람의 바로벳 전체가 매개 되어 있는 상태에요. 항상 돈 생각을 하는 이와 항상 사랑을 생각하는 이가 있다고 해봅시다. 이는 단지 각자의 ‘습관바로벳’ 때문에 벌어진 일일까요? 즉 한 사람이 습관적으로 돈만 떠올리거나 혹은 사랑만 떠올려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이는 그 사람의 바로벳 전체가 개입해서 벌어진 일일 겁니다. 한 사람의 바로벳 전체가 돈으로 얼룩져 있을 때, 그는 항상 돈 생각을 하게 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바로벳 전체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던 바로벳으로 구성되어 있을 때, 그는 항상 사랑을 생각하게 되는 거죠. 이처럼, ‘습관바로벳’은 습관적이기 때문에 매순간 “현재 속에서” 움직이지만, ‘전체바로벳’은 “과거 속에서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죠.
‘전체바로벳’과 ‘습관바로벳’이 만들어 내는 ‘역 원뿔’
그렇다면 이 두 바로벳은 서로 어떻게 관계 맺고 있을까요? 바로 여기서 베르그손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역 원뿔 도식’이 나옵니다. ‘역 원뿔 도식’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어요. ‘우리의 마음(의식)은 과거 전체(전체바로벳)인데, 우리는 왜 그것을 다 보지 못하고 부분적인 것만 보게 되는가?’ 좀 더 일상적인 이야기인 질문으로 바꾸면, ‘왜 나는 내 성격을 모를까?’ 혹은 ‘왜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볼 수 없을까?’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의 성격이나 마음은 부분 바로벳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죠. 한 사람의 성격이나 마음은 그가 지나왔던 과거 전체예요. 우리는 그 과거 전체, 즉 ‘전체바로벳’을 조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성격도, 자신의 마음도 잘 파악할 수 없게 되는 거죠. 베르그손은 ‘역 원뿔 도식’을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답해보려는 거예요. 이제 본격적으로 ‘역 원뿔 도식’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이는 아래와 같은 형상으로 이미지화할 수 있어요.
원뿔 SAB가 ‘전체바로벳’이에요. 이 원뿔을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원들이 있겠죠? 이 수없이 많은 원들이 바로 ‘부분 바로벳’이에요. 원 AB, 원 A’B’, 원 A’’B’’ … 가 ‘부분 바로벳’인 거죠. 이 ‘부분 바로벳(원)’들 다 모여서 ‘전체 바로벳(원뿔)’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제일 위에 있는 원(원AB)이 모호하고 흐릿한 ‘순수바로벳’이고, 그 아래 있는 수없이 많은 작은 원들(A’B’·A’’B’’…)이 분명하고 명료한 ‘상바로벳’이에요.
그리고 S는 신체에요. 이는 ‘습관바로벳’이기도 하죠. 우리의 신체는 ‘습관바로벳’으로 움직임이니까요. 걸을 때를 생각해 봐요. 과거 걸었던 일을 바로벳(상 바로벳)해서 걷는 건가요? 그렇지 않죠. 이는 신체로 습관화된 바로벳, 즉 생각(상바로벳) 없이 ‘습관바로벳’으로 인해서 걷게 되는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신체(S)에 각인된 ‘습관바로벳’이 닿은 평면 P는 우주적 생성의 횡단면이에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볼게요. 여러분이 새로운 도시를 가서 여행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몸이 어딘가를 가겠죠? 그런데 어디를 가고 싶고, 어디를 가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곳은 어디일까요? 그 사람의 ‘순수바로벳’과 ‘상바로벳’이죠. 아주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잠시 살았거나 혹은 오래전 연인에게서 ‘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바로벳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는 ‘순수바로벳’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겠죠? 이 ‘순수바로벳’이 특정한 마주침(영화·소설·그림)에 의해 ‘상바로벳’화 될 수 있겠죠. 그때 그는 “빈에 가서 레오폴드 미술관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게 될 겁니다.
순수바로벳→상바로벳→신체→우주적 생성의 횡단면
‘순수바로벳(원AB)’으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아래로 내려와 ‘상바로벳(원A’B’·A’’B’’…)’으로, 다시 ‘신체(S)’로 내려오게 될 때, ‘빈’으로 가서 레오폴드 미술관에 발을 딛게 되겠죠. 그리고 거기서 걷고 움직이는 일은 몸에 밴 ‘습관바로벳(S)’에 의해서겠죠. 신체(S)가 ‘습관바로벳’을 통해 행동함으로써 평면(빈) 각 지점에 찍히게 되겠죠. 그것이 그 사람이 가진 ‘빈’이라는 세계의 횡단면인 거죠. 그렇게 우주적 생성의 횡단면(P)이 형성되는 거예요.
나의 몸이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상은 … 매 순간 우주적 생성의 하나의 횡단면을 구성한다. 따라서 그것(몸)은 받은 운동들과 내보내는 운동의 통행로(lieu de passage)이며, 나에게 작용하는 사물과 내가 작동하는 사물 사이의 연결선이며, 한마디로 감각-운동적 현상의 자리이다. 『물질과 바로벳』 앙리 베르그손
‘습관바로벳’이 각인된 몸이 매 순간 “우주적 생성의 하나의 횡단면을 구성”하게 되죠. 우주(세계)는 하나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우주(세계)가 있는 거예요. 각자의 신체(S)가 찍는 평면(P)이 다 다르니까요. 한 사람이 죽을 때, 거대한 하나의 우주(세계) 속에서 그 사람만 빠져나가는 게 아니에요. 오직 하나뿐인 우주(세계)가 사라지는 거예요. 한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슬픈 것은 오직 하나뿐인 그 세계가 사라졌기에 느껴지는 슬픔인 거예요.
아들을 데리고 ‘빈’에 간 적이 있어요. 저는 레오폴드 미술관이 제일 좋았고, 아들은 자연사 박물관을 제일 좋아했어요. 제가 본 ‘빈’과 아들이 본 ‘빈’은 다를 거예요. 제게 ‘빈’이라는 “우주적 생성의 횡단면”의 중심은 레오폴드 미술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아들의 그것은 자연사 박물관으로 구성되어 있을 테니까요. 우리는 서로 다른 ‘빈(세계)’을 지각하는 거죠. ‘빈’에 대한 나의 지각은 우주에 대해서 내가 만들어 내는 평면이에요.
우리에게는 각자의 우주가 있고, 각자의 우주도 매 순간 변한다.
그런데 이 평면은 항상 같을까요? 즉, 한 사람의 지각으로 구성된 세계는 항상 같을까요? 저의 ‘빈은’ 언제나 레오폴드를 중심으로 구성된 ‘빈’이고, 아들의 ‘빈’은 언제나 자연사 박물관을 중심으로 구성된 ‘빈’일까요? 그렇지 않죠. ‘역 원뿔 도식’에 관한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봅시다.
원뿔 SAB가 나의 바로벳 속에서 축적된 바로벳들 전체를 나타낸다고 하면, 밑면 AB는 과거 속에 자리 잡아 부동적으로 머물러 있다. 반면 꼭지점 S는 매 순간 나의 현재를 그리며 끊임없이 우주에 대한 나의 현실적 표상의 움직이는 평면 P에 접하고 있다. 신체의 이미지는 S에 집중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평면 P의 일부를 이루면서 그 평면을 구성하는 모든 이미지들로부터 나오는 작용들을 받고 되돌려보내는 데 머문다. 『물질과 바로벳』 앙리 베르그손
원뿔 SAB는 ‘전체바로벳’이고, 원 AB는 ‘순수바로벳’으로 과거 속에 부동적으로 자리 잡고 있죠. 그런데 이 ‘순수바로벳(원AB)’이 ‘상바로벳(원A’B’·원A’‘B’‘…)으로 내려와 결국은 신체(S)까지 내려오겠죠. 그렇게 한 점에 집중되겠죠. 이 한 점이 신체(S)이고, 이를 통해 자신이 점유하는 공간(평면 P)에 접하게 되겠죠. 이 과정에서 신체(S)와 평면 P는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늘 새로운 평면을 구성하게 되겠죠. 신체의 고유한 특성은 끊임없는 행동(이동)이니까요. 그러니 ’S(신체)-P(공간)‘가 만들어 내는 평면은 반드시 항상 변화되는 평면일 수밖에 없어요.
저와 아들이 지각한 ’빈‘도 다르겠지만, 제가 지각한 ’빈‘ 역시 계속 변화하게 될 겁니다. 처음 ‘빈’에 갔을 때랑 두 번째 갔을 때 제게 ‘빈’이라는 평면은 결코 같을 수 없죠. 왜냐하면 첫 번째 ‘빈’에 갔었던 바로벳이 다시 덮이면서 저는 다른 신체로 다른 곳을 지각하게 될 테니까요. 이처럼, 우리에게는 각자의 “우주적 생성의 횡단면”이 있는 것이고, 또 각자의 우주적 횡단면 역시 끊임없이 재생성되고 있는 것이죠.
한 사람의 성격은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성이다.
신체의 바로벳은 습관이 조직한 감각-운동 체계들의 전체로 구성된다. 그러므로 이는 과거의 진정한 바로벳을 기반하는 거의 순간적인 바로벳이다. 『물질과 바로벳』 앙리 베르그손
우리가 실제로 생활하는 것은 대부분 “신체의 바로벳”, 즉 ‘감각’하고 ‘운동’하는 데 사용되는 체계인 ‘습관바로벳’에 의해서죠. 이 ‘습관바로벳’은 “과거의 진정한 바로벳” 즉 ‘전체바로벳’에 기반하지만, 거의 순간적으로 사용되죠. 역 원뿔 SAB(전체바로벳)의 아래로 내려와서 ‘상바로벳’(원A’B’)을 거쳐 ‘신체’(S)까지 내려오는 순간에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원뿔을 구성하는 수없이 많은 원들이 아래로 내려와 하나의 점이 되는 순간(S)에만 신체가 운동하게 되죠.
이제 우리는 ‘왜 나는 내 성격을 모를까?’ 혹은 ‘왜 내 마음을 잘 들여다볼 수 없을까?’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죠. 우리는 자신의 성격과 마음을 왜 잘 모를까요? 우리는 드러난 특정한 ‘행동’을 통해서만 우리의 성격과 마음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직장에서 작은 실수에는 불안해하지만, 막상 큰일이 닥쳤을 때는 침착한 이들이 있죠. 이들은 불안한 사람인가요? 침착한 사람인가요? 또 주변 사람들의 작은 잘못에는 불같이 화를 내지만, 큰 잘못에는 덤덤한 이들이 있죠. 이들은 차분한 사람인가요? 다혈질인 사람인가요?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순간적인 ‘습관바로벳’(행동)을 통해서만 자시느이 성격과 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의식(성격·마음)은 원뿔 SAB 자체인데, 우리가 자신의 의식을 확인하는 순간은 원AB(순수바로벳)→원A’B’(상 바로벳)→S/P(습관바로벳)로 내려온 제일 끝 지점인 S/P(습관바로벳)에서죠. 그래서 우리는 때로 자신의 낯선 모습에 당황할 때가 있는 거예요. ‘순수바로벳’ 중 어느 바로벳이 ‘상바로벳’이 되어, ‘신체’로 응축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신체가 평면 위에서 무슨 운동을 어떻게 할지는 자신의 바로벳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처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매 순간 달라지니까요.
그러니 ‘나’의 의식 전체(마음·성격)는 두 가지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바로벳 전체를 얼마나 조망할 수 있느냐?’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과 조건이 무엇이냐?’ 한 사람의 총체적인 의식(마음·성격)은 하나의 개념(불안·침착·차분함·다혈질)으로 규정할 수는 없어요. 우리의 의식은 하나의 경향성으로만 파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각자의 바로벳이 특정한 조건 아래서 드러나게 되는 경향성이 바로 그 사람의 총체적인 의식인 거죠.
작은 실수에는 불안하지만, 큰 실수에 침착한 이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는 어린 시절부터 사소한 실수에는 굉장히 많이 혼났지만, 가출을 해서 몇 주를 떠돌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는 따뜻한 위로를 받은 바로벳이 있는 사람일 겁니다. 이런 바로벳을 가진 이는 작은 실수라는 조건 아래서는 불안하지만, 막상 큰일이 닥친 조건 아래서는 의외로 침착할 수 있는 거죠. 그는 불안한 사람도, 침착한 사람도 아니고, 어떤 조건 아래서는 불안하고, 어떤 조건 아래서는 침착함을 유지하는 경향성을 가진 사람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