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우리카지노
- 에리히 프롬
인간은 왜 사는가. 그것은 죽지 못해서도 아니고 성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며 뭔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삶은 이미 주어졌고 우리는 그냥 살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이나 장자나 사르트르의 말처럼 삶은 수단이 아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니 존재에는 의미와 이유가 없다. 그저 지금 여기에 있음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그 있음에 집중하고 이왕이면 우리카지노하고 이왕이면 나만의 사유력과 나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낭만을 채우고 싶다.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최대한 즐겨볼 것이다.
<좋은 문구 발췌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실감하려면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활동적일 수 있는 자기 나름의 힘과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이기심은 "자신에 대한 우리카지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이오필하게 우리카지노하는 사람은 "지성과 감정, 관능의 특징을 모두 갖춘 인성 전체를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우리카지노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우리카지노 증오하게 된 것이다.
고요를 좋아하지 않으면 우리카지노은 없다. 우리카지노은 행동, 소유, 사용이 아니라 존재에 만족하는 능력이다.
삶을 우리카지노할 수 있는 비법은 없지만 많이 배울 수는 있다. 망상을 버리고 타인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 계속 밖으로만 나다니지 말고 자신에게 가는 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카지노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우리카지노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
인간은 주변 사람과 자연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광기란 바로 그렇게 정리할 수 있다. 광기란 전혀 관계 맺지 않는 사람의 상태라고 말이다.
진정한 우리카지노에는 타인과의 연관성과 자신의 온전함이 보존된다.
반응적 증오는 증오를 일으키는 것이 상황이다. 성격으로 인한 증오는 반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적개심이 상황으로 활성화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증오가 활성화되면 마치 숨어 있던 적개심을 표출할 합당 한 기회를 찾아 기쁘기라도 한 듯 당사자에게서는 안도감같은 것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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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평등이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귀하며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우리 모두 동일하며, 혹은 종교적으로 풀이해서 만인은 신의 자녀이며 다른 사람을 자신의 신이나 주인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태어나겠다는 마음가짐(이것은 모든 '안전'과 망상을 버리겠다 는 마음가짐을 말한다)은 용기와 믿음을 요구한다.
창의적 자세를 키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와 믿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둘을 장려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지만 여기서 말우리카지노 창의성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나 예술가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자세다. 창의성 교육은 삶의 교육과 같은 뜻이다.
물론 이런 이분법의 원칙에도 예외는 있다. 파스칼의 명언 하나만 떠올려봐도 충분하다. "심장에는 이성이 모르는 이유가 있다"(파스칼, 1972, 277쪽). 따라서 감정은 사고만큼 합리적일 수 있고, 이성과 일치할 수 있다. 감정에도 나름의 합리성과 논리가 있다. 내가 보기에 감정이 인간 본성의 현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불교 사상과도 비슷한 세 가지 능동적 감정이 있다고 보았다. 정신력, 굳건한 의지, 관용이 그것이다.
자신을, 자신의 호불호를 타인에게 투영하지 않으려 면 어느 정도의 훈련과 감수성, 매우 높은 객관성이 필요하다. 그에 더해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다른 우리카지노을 창의적으로 본다는 것은 투영과 왜곡없이 객관적으로 본다는 뜻이며, 이는 어쩔 수 없이 투영과 왜곡을 낳는 자기 내부의 신경증적 '악덕'을 극복한다는 의미다. 완전히 눈을 떠 내면과 바깥의 현실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그런 내면의 성숙에 이른 우리카지노만이, 자신의 투영 과 왜곡을 최소로 줄일 수 있는 우리카지노만이 창의적으로 살 것이다.
내가 말우리카지노 독창성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원을 두는 경험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감정, 다시 말해 기쁨도 의미도 없는 우리카지노 살았다는 감정과 함께 자라난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재와 내면 활동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이론에 큰 관심이 없다.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는지 설명우리카지노 이론 역시 따분하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도 추상적 지식을 넘지 못한다. 학교에서 배운 역사 자료나 시 혹은 세계관처럼 정신적 자산에 머물고 만다.
활동적 인간, 생산적 인간에 대해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겠다. 그는 흔히 말하는 분주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 마르크스도 말했듯) 내면에서부터 활동적인 사람, 활동적으로 세상과 관계 맺는 사람, 세상과의 관계 맺음과 연결이 내면의 필연성인 사람이다. 그는 삶의 과정에서 쉼 없이 변하고, 모든 행위에서 같은 사람이 아니며, 정반대로 모든 행위가 동시에 그의 인성 변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형태의 활동성은 다름 아닌 관조적인 삶, 다시 말해 진리 추구에 있다고 말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활동적인 삶을 적극 옹호하지만 그가 말하는 활동성은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카지노과 헌신의 정신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는 '활동성' 과 '수동성'의 개념이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사실상 스피노자의 모든 이론 체계는 이러한 활동과 고통이라는 개 념의 언저리를 맴돈다. '수동적 passiv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고통당하다 passio'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활동적이란 말은 하나의 행위가 온전히 나의 인간 본질에서 나오는 동시에 이성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고통을 당하면, 즉 수동적이면 그의 행동은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이성적이지 않고 그 자신이 아니라 외부에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