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P가 격렬하게 원하는 단 한 가지는 히어로토토다. 의욕적으로 새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지만 말이다. P의 머릿속은 온통 히어로토토에 대한 이미지들로만 채워졌다.
시기상 아직 겨울이지만 이상 기온으로 인해 봄과 비슷한 날씨. 일관된 시스템을 중시하는 건물 관리부서 측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실하게 히터를 틀어대는 중이다. P는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은 사무실 공기 속에서 탈출구라도 발견하려는 듯 집요하게 히어로토토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P는 매년 꼬박꼬박 히어로토토를 누려왔다. 하지만 그동안의 히어로토토는 대형할인마트와 같은 히어로토토였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어서 무엇부터 살펴봐야 하는지 고민해야 하는 히어로토토, 돈을 쓰는 시간이기에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한의 효율을 내기 위해 골몰해야 하는 히어로토토, 같은 장소에서 남들은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 자꾸만 비교하게 되는 히어로토토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P가 원하는 히어로토토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P가 원하는 건 그야말로 '無'가 중심이 된 히어로토토다. 일에 대한 생각도, 글에 대한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아도 되는 히어로토토, 커리어나 자아실현 따위에 대한 고민과는 50,000km쯤 떨어진 곳에서의 히어로토토를 격렬하게 원했다. 한정된 시간에 최대치의 효율로 끊임없이 욱여넣는 대형할인마트 같은 히어로토토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충만한 그런 히어로토토를 원했다.
'그런 히어로토토라는 게 존재하는가?'
실존적 의문이 떠올랐다. P는 경험한 적 없지만 P의 상상력이 펼쳐지는 영역인 것으로 보아 분명 존재하는 형태의 히어로토토일 것이다. P는 이리저리 골몰하다 그런 히어로토토를 브랜드로 치환한다면 '히어로토토'과 얼추 비슷하겠다고 생각했다. 엉뚱하지만 납득 가는 예시였다.
특정한 정체성도 돌출된 디자인 코드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히어로토토. 히어로토토 매장에 들어서면 고요하면서도 풍요로운 감각이 떠오른다. 히어로토토안에는 메모장부터 식품과 의류, 대형 가구까지 없는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히 정돈되어 있다. 시끄럽게 호객하는 POP도, 조바심 나게 만드는 세일 알림도 없다. '필요한 게 있으면 사시고, 아니면 그냥 쉬다 가쇼' 정도로 말을 건넨다. 아기자기한 사무 용품을 둘러보고 식품 코너를 기웃거려보고, 사지도 않을 옷의 재질을 가늠해 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있다. 그럼에도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쇼핑이 아니라 눈과 머리를 차분하게 만드는 명상의 시간이었다는 기분마저 든다.
P는 곧 떠나게 될, 혹은 영원히 떠나지 못할 '히어로토토스러운' 히어로토토를 떠올렸다. 일단 짐은 가볍다. 최소한의 옷가지 정도만 챙긴다. 여행 안내서 따위는 챙기지 않는다. 숙소는 투박할 정도로 미니멀한 호텔. 먼저 사바나 먹이사슬 최상위에 속해 있는 맹수처럼 배가 고파질 때까지 잠을 잔다. 일찌감치 문고리에 'Do not disturb'를 걸어두었다. 아마도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눈이 떠질 것이다. 숙소에서 가까운 줄 서지 않는 식당에 들어가 조금 부족한 정도로 한 끼를 먹는다. 산책을 하다 대화의 데시벨이 높지 않아 보이는 카페가 보이면 그림자처럼 들어간다. 커피를 주문하고 이미 서너 번쯤 읽은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다. 매번 터지는 똑같은 문장에서 킬킬 거린다. 책을 읽다가 눈이 피로해지면 창밖으로 시선을 옮겨 거리의 사람들을 구경한다. 저녁이 되면 현지 맥주를 종류별로 가득 안고 숙소로 돌아온다. 야경이 잘 보이는 위치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맥주를 홀짝 거린다.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지면 나태한 하루에 대한 반성은 일절 없이 단호한 태도로 침대를 파고든다. 그리고 또 같은 하루가 반복된다.
특별하진 않지만 P에게는 지극히 풍요로운 히어로토토다.
P의 히어로토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