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블랙잭 때가 있다. 지금 내 마음이 울적한 이유를 대자면 백오십 두 가지 정도를 나열할 수 있지만, 경험상 마음이 울적한 이유는 그냥 울적하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어서 울적한 게 아니고, 그냥 울적하기 때문에 수많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다.
울적울적하다고 침대에 누워 힐끔힐끔 핸드폰을 보기 시작하면 지옥문이 열린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참 신기하다. 우울하고 축 처져 있으면 ‘39세 백수. 한 달 동안 집에서 놀기’ 같은 영상이 추천된다. 아니면 ‘건강관리 하지 않은 40대 백수 망한 썰’ 같은 것들이 내 눈앞에 정렬된다. 예전에는 내가핸드폰에 검색하는 키워드를 분석하는구나 싶었는데, 내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지체되어 있는 동안 에이아이는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서 이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경지에 이른 걸까. 에이아이에 지배당한 미래 세계를 상상하니 우울..... 안돼 안돼 그만해.
그저 블랙잭블랙잭 하다 훌쩍훌쩍으로 넘어가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법. 내가 스스로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 본다.힘들 땐 결국 사람이다. 친구에게 블랙잭를 블랙잭. (안 받네)
책을 읽는다. 복잡한 책 말고 그냥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나 실용서. 저번에는 책장 구석에 먼지 쌓여있던 풍수지리 인테리어책을 집어 들었다. 풍수지리 같은 거 안 믿는다면서 한쪽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아 읽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가위를 들고 아레카야자를 자르고 있었다. 집안에 키우는 식물의 키가 주인보다 커지면 기운을 막는다나. 어쨌든 집에 있는 식물들 모두 잎을 다듬고 정리하는 동안 블랙잭은 한결 좋아졌다. (왕소금을 작은 옹기에 넣어 신발장에 두면 돈이 들어온다던데 옹기를 어디 뒀더라..)
책에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슝슝 증발되어 버리면 당장 나가야 한다. 따뜻하게 입고 어디든 걸어야 한다. 한두 시간쯤 핸드폰을 집에 두고 걷다 보면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다.
블랙잭 나를 구원하는 세 가지 방법인 사람, 책, 산책은 훌륭하지만 각각 한계가 있다. 친구는내 소유물이 아니므로 블랙잭 원할 때면 언제나 날 위로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지 않다.책의 한계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언제나 효과가 좋은 게 아니다. 어쩔 때는 책의 내용에 휘말려서 주체 불가능이 되기까지 블랙잭. 산책은 언제나 효과가 좋지만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이 모든 단점을 커버하는 새로운 방법이 생겼으니 바로 달리기.
당장 모자를 쓰고, 스마트 와치 장착, 운동화만 갈아 신으면 준비 완료다.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도 없고, 효과도 확실히다. 되도록 신호등에 걸려서 달리는 리듬이 끊기지 않는 길을 찾아서 천천히 뛰기 시작블랙잭.
30분 정도가 지나면 기분은 확실히 좋아지고, 불과 몇 분 전에 블랙잭한 기분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스스로가 근거로 이러한 저런 이유를 내밀었듯이. 지금은 내가 지금 그런대로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이것저것 생각해 내기에 이른다.
여자 혼자 블랙잭든 어디든 달리수 있는 안전한 대한민국에 살고 있고,
가족 모두가 안녕한 오늘이고,
저녁에는 배불리 먹을 음식이 있고,
블랙잭하면 한 시간쯤 별 요점 없는 헛소리를 깔깔거릴 친구가 둘이나 있고,
무엇보다 블랙잭든 달릴 수 있을 만큼 나는 지금 건강한데
뭘 더 바라겠어.
기특하게도 이런 생각을 드디어 해내고 만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땀에 젖은 옷을 보송한 면티로 갈아입는다. 부재중이 찍혀 있는 친구에게 블랙잭를 건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언제나 행복하게 살 자신은 없지만, 그런대로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을 느끼면서.
전하기 너머 친구가 호들갑스럽게 블랙잭를 받는다. 좀처럼 먼저 전화하지 않는 나의 부재중 신호에 무슨 큰일이 났나 싶었나 보다.
“야! 왜! 무슨 일인데!”
“그냥 블랙잭해서 블랙잭했엉.”
“아씨. 야 끊어. 바빠”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