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코난카지노의 역사를 여행하다
우리나라 지명의 유래를 찾아보면 그 지명에 해당 지역의 역사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많은 역사학자나 고고학자들이 지명을 통해 탐구의 힌트를 찾기도 한다. 두 도시를 합하여 앞글자씩을 따와 지명을 붙이는 사례가 아니라면, 그 고유의 지명 상당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역사의 증거이다. 지명의 역사에서 첫번째로 중요한 기점이 통일신라 당시 신라 35대왕 경덕왕이 시행했던 고유명사 한화정책이다.통일신라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자식 고유명사보다는 고대순우리말로 된 고유명사를 더 많이 활용하였다. 다만 고대순우리말을 표기할 수 있는 우리의 글자가 없다 보니 행정상의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신라의 경덕왕은 행정상의 편의를 위해 고대순우리말로 된 고유명사들을 대대적으로 한자어로 표기하는 한화정책을 시행했고, 그때 순우리말의 지명들이 비슷한 발음에 맞게 한화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대구 편]'에서 이미 소개한 예시로, '달구'였던 우리나라 고유어의 지명이 한화되어 '대구'로 바뀐 것이다.
또 한 가지 예시가 이번 여행지인 경북의 고령이다. '고령' 역시 경덕왕 때의 한화정책으로 갖게된 한자식 지명이고, '고령'의 원 고대순우리말은 '가야'였다. 고령은 옛 가야의 중심이었다. 무언가 갸우뚱 거리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가야의 심장은 경남의 김해가 아닌가? '가야'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곳은 김수로 왕이 세운 경남의 김해가 맞다. 하지만 훗날 고령에서 탄생한 어느 한 부족국가가 발전하더니 '가야'라는 명칭을 함께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김수로왕이 경남 김해에 세운 가야를 금관가야, 고령에서 '가야'라는 국가명을 썼던 나라를 대가야라고 한다.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또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사 미지의 고대왕국 가야. 금관가야를 파헤쳤던 지난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김해 편]'에 이어 이번 고령 여행을 통해 대가야를 찾아가보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담겨 있는 코난카지노의 건국신화는 이렇다. 자주색 끈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와 여섯 개의 알이 담긴 상자를 내려다주었는데, 그 중 한 알에서 태어난 김수로왕이 오늘날 김해에 금관코난카지노를 건국하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 나온 다섯 아이들이 각 읍에 가서 다섯 개의 코난카지노를 세워 그곳의 군주가 되었다고. 김해의 금관코난카지노 외 다섯 코난카지노들이란 함안의 아라코난카지노, 상주의 고령코난카지노, 고령의 대코난카지노, 성주의 성산코난카지노, 고성의 소코난카지노. 이중 시조의 이름이 전해지는 건 금관코난카지노의 김수로왕과 고령의 대코난카지노를 세운 이진아시(혹은 뇌질주일/내진주지)다. 신화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어느 신화든 금관코난카지노의 김수로왕과 대코난카지노의 이진아시는 형제관계로 설정되어 있다. 대코난카지노의 시조 이진아시는 신화적 인물이며, 다른 코난카지노의 시조 이름들은 전해지지 않으면서 대코난카지노와 금관코난카지노의 시조만 전해지고, 또 이 둘을 형제 관계로 맺은 건 후대인들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만들어낸 신화임은 분명하다. 코난카지노 연맹의 후기 맹주였던 대코난카지노가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코난카지노 연맹의 전기 맹주였던 금관코난카지노와 신화적으로나마 엮으려던 의도였을 것이다.
'6코난카지노'라고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 성과물이 나오며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코난카지노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코난카지노는 금관코난카지노와 대코난카지노 두 곳밖에 없다. '코난카지노'라는 국가명칭은 금관코난카지노의 전신이 되는 변한 12개국 소국 중 '구야국'에서 유래했다. 금관코난카지노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 '코난카지노'는 오로지 김해의 구야국에서 발전한 국가만을 가리켰다. 'XX코난카지노'는 전부 잘못된 표현이다. 당시에는 고유의 국명이 따로 있었고 'XX코난카지노'는 고려시대 쯤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하던 소국들을 뭉뜽그려 부르기 위한 용어로 생겨났을 뿐이다.
고령의 대코난카지노도 원래 국가명칭은 반파국이었다. ('반파'가 어떤 의미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언제 반파국이 세워졌는지도 알 수 없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아닌 부족국가 수준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여러 소국들이 난립하고 있었고, 소국들 가운데서는 철의 생산 및 교역 그리고 중계무역으로 성장한 김해의 금관코난카지노가 소국들의 리더 역할을 맡았다. 금관코난카지노 중심의 연맹을 전기 코난카지노 연맹이라고 한다. 이때까지 고령에 있던 소국은 대코난카지노가 아닌 반파국이었다. 4세기경 금관코난카지노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금관코난카지노를 포함한 소국들은 전부 4세기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던 근초고왕의 지배에 복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근초고왕은 그동안 코난카지노 연맹을 주도해왔던 김해의 금관코난카지노를 견제하기 위해 다른 소국 중 하나를육성하였다. 백제의 근초고왕은 당시 백제의 수도인 한성에서 먼 낙동강 하류 지역보다는 영남 내륙 지방의 소국 중 하나를 키워주는 편이 더 유리했고,그렇게 백제 근초고왕의 선택을 받은 국가가 고령의 반파국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임나가야다. 한국 측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고, 신화로 버무러진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고대시대 일본이 가야를 통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는데, 그 식민지배기구를 '임나가야'라고 한다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건 고구려인들이 직접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이 보낸 고구려군 5만이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임나가야 종발성까지 내쫓았다는 기록이다. 임나가야는 실체가 있는 무엇인 건 확실하지만 정확히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어 일본은 근거 없는 주장을 무턱대로 고집부리지만, 실제로는 백제가 반파국을 통해 백제와 신라 사이에 있던 소국들을 관리하던 지배기구로 보고 있다. 임나가야의 운영권자는 백제의 8성귀족 중 하나인목씨 가문이었으며, 다만 5세기경 광개토대왕이 남하하였다는 임나코난카지노의 '종발성'은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다. 정황상 쇠퇴하기 시작한 김해의 금관코난카지노보다는 백제의 비호를 받고 있는 고령의 대코난카지노 부근이라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 같다. 그 뜻은 '코난카지노'라는 상징적 명칭을 반파국이 사용하기 시작했고, 4~5세기 사이 반파국이 국가명을 '대코난카지노'로 바꿨다고 볼 수 있다. 5세기 이후로 대코난카지노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소국들을 대표하는 맹주 역할을 맡았다. 대코난카지노 중심의 코난카지노 연맹을 후기 코난카지노 연맹이라 한다.
5세기 고구려의 팽창으로 백제가 수도를 옮기는 건 급작스레 국력이 쇠퇴하자 이 틈을 타 대코난카지노는 백제로부터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영토를 전라남도 남원까지 넓히고, 독자적인 이름을 가진 채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으며, 6세기에는 대코난카지노의 이뇌왕이 신라의 법흥왕과 혼인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6세기 백제에선 성왕이 등극하여 백제의 중흥을 꾀하며 다시 백제-신라 사이 소국들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532년 그간 유명무실했던 김해의 금관코난카지노가 신라에 병합되었다. 금관코난카지노의 병합 후 백제-신라 사이의 소국들은 언제 자기들도 금관코난카지노처럼 신라에게 병합될 지 몰라 두려움에 떨며 이 사태에 대해 논의하자며 541년과 544년 백제 성왕과 두 차례 국제회의를 가졌다. 백제의 성왕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고 있고 백제의 국력이 예전과 다르니 백제의 보호를 받는 국가들은 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며 소국 대표들을 달랬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동맹이 깨지고 554년 백제의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지며 백제의 국력은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더 이상 백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던 신라의 진흥왕은 대대적인 낙동강 유역 정벌에 나섰고, 562년 대코난카지노가 마지막으로 멸망하였다.
대가야의 마지막 왕자는 월광태자로, 대가야 멸망 후 망국의 한을 탄복하며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 월광태자라는 인물도 미스테리로 가득한 역사적 인물이다. 월광태자는 과거 대가야의 이뇌왕이 신라 법흥왕의 공주와 혼인동맹 차 결혼했을 때 낳은 아이였다. 모계가 신라 왕실이다보니 월광태자는 당연지사 친신라적 성향을 띄었을 텐데, 백제 성왕의 등극 후 대가야는 친백제 외교로 돌아섰다. 가야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은 월광태자가 대가야의 공식적인 멸망 이전에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기록된 대가야의 마지막왕은 도설지왕인데, 이상한 건 신라 측 비문을 확인하면 대가야 멸망 이전에 도설지왕이 신라의 장군으로 전쟁터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대가야의 마지막왕 도설지왕과 월광태자는 동일인물로 보는 학설이 통설이다. 신라는 대가야를 바로 잡아먹으면 그 후폭풍을 우려해 이미 망명을 와 있던 월광태자를 바지사장 앉히듯 대가야의 마지막 왕으로 앉혀두고 자연스럽게 562년 대가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 진흥왕 편을 보면 562년 대가야가 먼저 신라에 반기를 들며 전쟁을 일으키자 신라의 진흥왕이 화랑 사다함에게 대가야를 정벌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가 친신라적 성향이 강한 월광태자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혔는데, 굳이 군대를 동원해 전쟁으로 대가야를 멸망시켰다는 대목은 이해하기 힘들다. 대가야는 시작부터 끝까지 미스테리만 남긴 국가로 남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대가야의 흔적은 대가야의 왕족들이 묻힌 지산동의 고분군뿐이다. 지산동 고분군 입구에는 대가야박물관이 세워져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의 유적들을 전시하고 있어 대가야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전시를 통해 접할 수가 있다. 주요 전시품을 보자면 이렇다. 우선 금관이다. 지산동고분군에서 출토된 금관은 '가야'라 불린 국가들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금관이다. 지산동고분군 32호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가야를 상징하는 금동관으로 자리매김하였으며, 출(出)자를 기본형으로 하는신라의 금관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가야만의 미를 뽐내는 금동관이다. 지산동고분군 32호 출토의 금동관이 강인한 힘을 보여준다면, 지산동고분군 44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우아한 아름다운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금동관은 동판에 도금을 한 공예품이며, 금관은 전체 재질을 금으로 조각한 공예품이다) 국보 138호에 지정된 대가야 금관은 아리따운 나무 모양의 세움장식을 네 방면에 꽂아두고 머리띠에는 앙증맞은 곡옥을 걸어두어 장식했다. 지산동고분군 32호 출토 금동관이나 44호 출토 금관이나 신라의 금관만큼이나 웅장한 맛은 없지만 소박하되 그 가운데서도 장식성을 살린 미감이 두드러진다. 다만 대가야박물관에 전시 중인 두 유물은 복제품이고, 지산동고분군 32호 출토 금동관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지산동고분군 44호 출토 금관의 원본은 서울 삼성리움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다음은 가야의 도기다. 역시나 가야는 철의 나라인 동시에 도기의 나라였다. 가야는 신라에게도 토기제작과 토기 예술을 전파해주며 고대 한국의 도기 중심지가 되어주었다. 일본에서도 가야의 도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스에기 토기'라는 양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가야를 심지어는 '도기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청동기 시대까지 쓰인 토기는 철기시대로 넘어오면 더 강력한 화력을 이용한 우수한 '도기(질그릇)'로 발전하였다. 색깔도 지역을 불문하고 짙은 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이를 와질도기라고 한다. 이런 회색빛깔의 와질 질그릇은 특히 경상도 지방, 신라와 가야에서 발달했다.시간이 더 흐르면 도기 굽는 기술이 더 발전해 더 단단한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와질도기와 구부하기 위해 강도에 따라 연질도기, 경질도기로 구분하였고 경질도기는 색깔도 어두워져갔다.다만 가야도 워낙 여러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던 만큼 지역별 차이를 보인다. 가야의 근본인 김해의 금관가야의 경우 도기를 떠받치는 굽다리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며, 고령의 대가야의 경우 도기의 접시와 뚜껑이 납작하고 뚜껑에는 꽃망울 같은 단추모양의 손잡이가 꼭 있다.
역시 코난카지노를 대표하는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철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삼국사기 시대의 철제갑옷 중 75%가 코난카지노의 것일 만큼 철은 코난카지노의 자존심이었다. 처음 코난카지노 연맹을 주도했던 금관코난카지노가 '구야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번창할 수 있었던 것도 철의 제작과 국제무역 덕분이었다. 어느샌가 고령의 대코난카지노도 자체적인 철 제작이 가능해졌으며 경북지역의 여러 강들을 이용한 무역까지 활용하여 금관코난카지노만큼이나 철의 왕국으로 부상하였다.
지산동고분군은 대가야 왕족들(혹은 귀족을 포함한 지배층)의 무덤군으로, 1500년 전 대가야의 모습을 장엄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이다. 시기적으로 5~6세기로 추정되는 고분이 무려 700여 기가 집결되어 있는 대형 무덤군으로, 이 정도 규모의 대형무덤군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사의 역대 왕조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거나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아닌, 작은 소국의 무덤군이 이 정도 압도적인 규모의 무덤을 조성해왔다고 하니 대가야란 나라가 대단하기만 하다. 조금의 체력을 소모해 언덕의 높은 곳에 올라가면 수 백기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혹은 듬성듬성 모여 경이로운 장관을 펼쳐낸다. 가야의 원류 금관가야가 있던 김해에도 대성동고분군이 있지만, 고분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 봉분마저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어있진 않다. 어느 시대든 이 지산동고분군을 보는 사람이라면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일제시대 때는 일제의 타게트가 되었다. 1906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지산동고분군을 세간에 알리면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여러 고고학자들을 지산동고분군을 보내 가야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지시에 일본의 학자들은 무분별하게 지산동고분군을 파헤쳐 일부가 크게 손상되고 말았다. 우리가 나라를 되찾은 이래 여러 방면에서 지산동고분군을 회복하고 홍보하는 노력이 이어져 지난 2023년엔 다른 가야의 고분군들과 함께 고령의 지산동고분군은 '가야고분군'이란 이름 하에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무지막지하게 광활한 무덤군을 다 하나하나 훑어보긴 어렵고 몇 가지만 골라 봐야 하는데, 무엇을 집중적으로 찾아가봐야할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몇 가지만 추천드리자면 이렇다. 먼저 지산동 73호분이다. 지산동 73호분은 지산동고분군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지산동고분군을 시작시킨 장본인의 무덤이며, 대코난카지노 왕릉의 시초 격에 해당한다. 지산동 47호분은 지산동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큰 봉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만큼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지산동 47호분은 대코난카지노의 금림왕 혹은 이뇌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산동 47호분의 봉분이 가장 크지만, 지산동고분군의 무덤들 중 최고위계자의 무덤으로 보고 있는 봉분은 지산동 44호분과 지산동 45호분이다. 지산동고분군에 묻힌 망자들 가운데 두 봉분의 주인이 가장 강력한 권력을 최고위계자로 보는 이유는 두 봉분이 코난카지노 고분군들 가운데 최대 규모의 순장 무덤이기 때문이다. '순장'이라 함은 무시무시한 이국의 고대문화로 여겨지지만 저 오랜 시절에는 코난카지노를 필두로 하여 한반도에도 대규모 순장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순장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초창기에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신라의 경우 6세기경 22대 지증왕이 순장 문화를 금지시켰다는 기록에서 그 이전까지는 신라에도 순장문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고고학적인 순장의 흔적은 발견된 바 없다. 이에 반해 코난카지노의 소국들의 경우 뚜렷한 고고학적 순장의 흔적이 발견되었고 그중에서도 고령 대코난카지노의 지산동고분군에선 최대 규모의 순장이 확인되고 있다. 무덤을 파헤쳐보면 피장자와피장자 외 여러 명의 인골들이 발굴되는데,순장자의 순장되는 위치는 껴묻거리 물건들을 넣는 공간 혹은 피장자의 발치 아래이다. 말그대로 부속품 취급을 받았다는 뜻이다. 대성동고분군의 29호분의 순장이 현재까지 발견된 순장의 사례들 중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으며시기적으로 약 3세기로 추정하고 있다.고령 지산동고분군에는 한 봉분 안에 순장자들이 묻히기도 하였으나, 특이하게도 피장자의 봉분 밖에 순장묘 혹은 순장곽이라는 순장자들만의 무덤이 따로 나타나기도 한다. 지산동 44호분에서는 무려 32명의 순장자들을 매장한 순장곽들이 있고, 지산동 45호분에서는 11기의 순장곽들이 발견됐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지산동 고분군에서최대 37명의 순장자들까지 순장되었다고 보고 있기도 하다.대코난카지노는 코난카지노 후기 연맹의 맹주국으로,‘코난카지노’의 원저작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금관코난카지노를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대코난카지노는 금관코난카지노보다 더 과장된 보여주기를문화적으로 표출하고자 했던 것이대규모 순장으로 확대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한국고대사 속순장문화의 시작은 외부유입설과 자연발생설로 나뉜다.통설로는 둘 모두를 인정하고 있다.고조선과 부여의 순장은 북방민족의 순장문화를유입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를 고구려와 백제가 끊어버렸으며,코난카지노 및 신라 등 영남지방의 순장은 자연발생한 것으로 분석한다.순장은 인력을 낭비하는 풍습이기 때문에상당히 미개하고사회경제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되는 풍습이 아니다.그래서 고구려나 백제는 일찌감치 순장 풍습을 없앤 것으로 추정하며신라도 조금 늦긴 했지만 순장을 금지시켰고,어쨌든 큰 나라로 발돋움하는 국가들은 전부 순장을 없애는 수순을 밟았다.오히려 신라는 신분이 미천한 자들을 낭도 등군사집단으로 등용하는 등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을 보였다.신분이 천한 사람을 코난카지노는 생매장해버리고,신라는 더 적극 활용하니코난카지노가 신라에게 넘어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 수도 있겠다.
이진아시, 이뇌왕, 도설지왕, 월광태자 등등 대코난카지노인으로 기록된 몇 안 되는 인물들이지만 아마 많이들 생소할 것이다. 다만 이 이름만큼은 익숙하리라 장담하니, 코난카지노금을 창시한 한국의 3대 악성 우륵이다. 우륵의 고향이 바로 고령의 대코난카지노였으며, 그가 만든 현악기의 이름도 그의 대코난카지노에서 따왔다. 대코난카지노는 562년 신라의 24대왕 진흥왕에게 멸망했으나, 이미 그전부터 대코난카지노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니 많은 대코난카지노인들이 신라로 망명을 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하나가 음악인 우륵이었다. 우륵은 대코난카지노에 있던 시절 중국의 전통악기인 '쟁'을 보고 영감을 받아 12줄로 된 현악기를 만들었고, 이것이 바로 코난카지노금의 시작이다. 우륵이 코난카지노금으로 작곡한 노래들이 그 음악 세계가 워낙 깊고 진하여 대코난카지노의 왕이었던 가실왕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우륵은 가실왕의 지시로 12곡을 작곡하였다. 12곡이란하가라도,상가라도,보기, 달기, 사물,물혜,하기물,사자기,거열,사팔혜,이사,상기물인데, 해당 곡명들은 전부 낙동강 유역, 코난카지노 연맹을 이루던 소국들의 지명을 가리키고 있다. 비록 우륵 자체는 대코난카지노 사람이지만 낙동강 유역 소국들의 각 지역적 정체성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대코난카지노의 운명이 위태로울 무렵 대코난카지노의 가실왕이 우륵에게 각 소국들의 지명에서 이름을 딴 노래들을 작곡하라 한 지시는 연맹의 결속력을 음악으로나마 다지려고 했던 노력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한반도의 국제정세가 가야를 비롯한 소국들에게 너무나도 불리하게 흘러가자 우륵도 대세에 따라 551년 신라로 망명을 떠났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이 직접 우륵의 명성을 듣곤 그의 음악세계가 궁금하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초대하여 연주하도록 하였는데,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이 연주한 노래에 크게 감동을 받아 우륵이 만든 12현금에 '가야금'이란 명칭을 직접 하사하였다. 진흥왕은 귀순한 우륵에게 지금의 충주 지역에서 머무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래서 충주의 탄금대에서는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충주를 포함해 충북 지역은 신라의 진흥왕이 가야 유민들과 망명민들을 집단적으로 모아둔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유신의 고향도 충북 진천이다.)
이듬해 552년 우륵의 음악을 더 확장하기로 한 진흥왕은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람을 우륵의 제자로 삼도록 하였다.우륵은 세 사람의 재능을 헤아려 계고에게는 코난카지노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쳐 우륵의 음악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하였다. 오히려 계고, 법지, 만덕은 청출어람을 하여 우륵의 음악세계를 뛰어넘었다고 하는데, 계고, 법지, 만덕 세 사림이 각자의 재능을 살려 5곡을 더 작곡하였는데 우륵이 다섯 곡을 듣고는 "즐겁고도 방탕하지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고 할 만하다." 라며 극찬을 했다고 한다. 진흥왕 역시 우륵에게서 배운 세 사람의 음악을 듣고는 감동하여 궁중음악으로 삼았는데, 이때 진흥왕은 이런 말을 했다. "코난카지노왕이 음탕하고 난잡하여 자멸한 것이지 음악에 무슨 죄가 있으랴? 대체로 성인이 음악을 제정함에 있어서는 사람의 정서에 따라 이를 조절하도록 한 것이므로 나라의 태평과 혼란이 음률 곡조와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진흥왕이 개인적으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고대 시대의 왕국들은 음악을 유흥이나 문화생활이 아닌 통치이데올로기의 한 수단으로 여겼음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무가의 전통이 강했던 신라였기에 유독 더 음악에 관심을 보였을 수도 있다.
모든 악기가 그렇듯 악기의 재료가 중요한 법이다. 우륵이 만들었다던 코난카지노금은 오동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음악과 과학에는 깊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오동나무로 만든 코난카지노금에선 더 깊고 온화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우륵이 만들었다는 코난카지노금은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은 아니었다.중국 측 기록을 보면 "변한과 진한 지역에는 '슬(瑟)'이라는 현악기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을 닮았다"라고 전해지는 걸로 봐선 저 오랜 고대시절 한반도에는 중국에 없는 고유의 현악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륵이 창시한 코난카지노금은 변한-진한 지역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고유의 현악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일본의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코난카지노금이 발견되기도 하였다.통일 후 신라와 일본의 교류 과정에서 신라로 흡수된 코난카지노금이 일본으로도 전래된 것이다. 비록 코난카지노금이 대국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라'라는 대국으로 거듭나던 국가로 이어져 해외에도 진출하는 양상이야말로 바람직한 문화의 교류이자 문화의 흐름이 아닐까 하며, 오로지 문화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아닐까.
참고로 우륵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뽑히는 인물들은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과 조선시대의 음악천재 박연이다. 거문과와 코난카지노금의 차이점이라면 거문고는 6줄, 그리고 코난카지노금은 12줄의 현악기라는 점이다.
고령 시내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우륵의 생애와 가야금에 대해 전시하는 우륵박물관이 있다. 우륵박물관이 아무 곳에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옛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금장지 터에 만들어진, 장소성이 대단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의 지명마저 '가야금길'이다. 가야금길의 옛 지명이 '정정골'이었는데 우륵과 그 제자들이 만든 가야금의 소리가 정정하게 잘 들려서 붙여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가야금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전통악기로 손꼽힌다. 우리는 언뜻 유형의 문화유산이 더 잘 계승되어온다고 여겨지만 때로는 무형의 문화유산이 더 확실하게 내려오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문화와 예술의 힘이 아닐까 한다. 무형의 문화와 예술은 비록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순간 사라지지만, 잊히지만 않는다면 더 오래 그리고 더 발전하며 계승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계로 뻗어가는 K-POP이 대세에 오른 상황에서 가끔 K-POP 아티스트들이 한국의 음악을 샘플링하거나 음악에 넣어 세계에 한국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을 보면 한국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공력과 저력이 뿌리 깊은 근본을 바탕으로 더 발전할 수 있는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뿌듯해진다.
한국의 고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끝이 아니었다. 한국고대사의 말엽에 가면 세 나라 중 한 국가로 병합되기는 했지만, 수백년간 각 지역별 로컬리티를 유지해가며 이어져온 작은 고대 소왕국들이 존재했다. 현재 각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약 2000년~1500년 전 자신들이 사는 그 땅위에 세워진 국가와 사람들의 직계 후손이다. 예컨대 현 고령 시민들은 대코난카지노의 직계 후손이라고 당당하게 자신할 수 있다. 보통 다른 국가들의 고대사에는 한 개의 왕조 혹은 한 개의 왕국만이 있던 것이 일반적인데, 우리는 여러 소왕국들까지 분포한 덕에 고대사를 구성하던 역사와 문화가 다채로울 수 있었다. 설령 특정 국가들이 강대국에게 흡수가 되더라도 그 지역 사람들은 문화를 전승해나가며 문화의 다채로움 그 자체가 우리 한민족의 고전주의로 수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점에서 별 게 안 남겨진 왕국의 흔적이더라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럴수록 우리의 시야가 더 넓고 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사의 소왕국들은 밝혀진 것보다 밝혀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베일에 감추어진 신비의 역사들이 앞으로도 하나 둘 세상 밖으로 나와 대한민국 문화의 뿌리를 더 강인하게 장식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이영식<이야기로 떠나는 코난카지노 역사여행
국내에 몇 안 되는 가야사 전공의 역사학자 이영식 교수님께서 기행문 형식으로 가야의 역사를 풀어내는 책입니다. 역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가야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어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가야'라는 나라와 역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을 위한 책이죠. 가야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금관가야의 김해에서부터 시작해 부산, 대가야의 고령, 합천, 창녕, 함안을 거쳐 경남 고성까지 낙동강 유역에 분포하던 한국고대 왕국들을 답사하는 이야기죠. 한국고대사라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만 생각하지만 사실 그 사이에 수많은 소국들이 각 지역별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국가들인 만큼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각자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국가들이었고, 그들 또한 현재의 우리 한국으로 이어졌음을 부정할 순 없죠. 비록 저자분께서는 이 소국들을 가야 전체로 묶긴 하지만 가야연맹이 아닌, 그저 고유의 정체성을 가졌던 여러 소국들의 정체와 존재를 책의 내용에 따라 여행하는 느낌으로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
한국고전영화 중공포영화랍니다. 현대식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공포영화로 손꼽혔죠. 오늘날에도 어르신분들은 이 영화를 기억하며, 그때의 충격적인 공포를 잊지 못하신다고 하시기도 하죠. 변사가 나레이션을 더빙한 고전영화라 지금의 화법에서보면 당황스럽기 그지 없을 수도 있겠으나 이 당시 영화들은 이렇게 나왔구나 하며 보는 재미도 있죠. 첩의 시샘에 죽임을 당한 한 여인의 혼이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클리셰적인 이야기지만, 개연성을 해치지 않는 스토리의 흐름 덕에 진부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각종 공포적 요소들이 무더기로 나와 진부함을 느낄 틈이 없죠. 사운드와 분장과 편집까지 공포영화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토착적인 소재의 공포 모티프들은 무더기로 다 나와죠. 여인의 혼이 나타날 때마다 생전 그녀가 연주했던 코난카지노금의 소리가 들리는데, 아름답기만 한 코난카지노금 소리가 공포의 소리로 표현됩니다. 그러고보니 살아있는 자의 코난카지노금 소리나 죽은 자의 코난카지노금 소리나 구슬프긴 같네요. '코난카지노금'이란 우리 한국 고유의 문화가 이처럼 다른 문화매체의 모티프로 다양하게 활용되는 쓰임을 보고, 문화컨텐츠로서 우리 문화의 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