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의 의미를 여행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때가 있다. 'No Place Like Home' 'Home Sweet Home' 같은 속담이 있을 만큼, 집이란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안락한 정서를 담당해주는 일종의 보금자리다. 1인 가구든, 커플이 사는 집이든, 자녀가 있는 가정이든, 다세대 가구이든 집은 저마다의 의미로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을 제공해준다.
집이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안정감'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책임져준다.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있을 땐 그 의미를 확연하게 느껴지진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내 생활의 베이스를 다져주는 곳이 집이다. 따라서 집을 일구는 것이 인류 역사에서 첫 단계가 되었고, 역사의 발전은 인류가 집을 일구면서 시작하였다. 역사가 더 고도화됨에 따라 인간의 문명이 다양화해지고 복잡해지는 과정에서 이제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 모두 해결된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의식주 중에서 '주'의 기능이 오히려 감퇴하고 있는 현상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이제는 미쳐버린 집값에 청년 세대는 집을 산다는 것을 유토피아적 환상코어카지노 남아버렸고, 도시가 고도화되어도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와 현상코어카지노 인해 우리가 가장 먼저 보장받아야 할 집의 기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추진되면서 이제는 현대시대를 살아가는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도 여러 가지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왔다. 지나치게 서울로 집중되는 과밀화 현상을 해결하고자 서울 외곽 경기도 근교도시에 아파트를 신축하며 신도시를 만들어왔다. 주거지로서 집의 기능은 단순히 누울 곳이 있다는 아파트만 있어서는 안 된다.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다양한 인프라가 구축되어야 하고 또 한 마을 내지 한 동네에서 혹은 타 지역간의직간접적인 교류를 활성화하여 유기적으로 기능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정부 차원에서 계획적으로 조성한 동네를 신도시라고 한다. 1989년 경기도 코어카지노의 분당, 경기도 고양의 일산, 경기도 부천의 중동, 경기도 안양의 평촌, 경기도 군포의 산본이 1기 신도시로 개발되었고, 2003년 경기도 코어카지노과 하남의 위례신도시, 경기도 코어카지노의 판교, 경기도 화성의 동탄, 경기도 파주의 운정, 경기도 수원과 용인의 광교, 경기도 김포의 한강신도시, 경기도 양주, 경기도 평택의 고덕, 인천의 검단이 2기 신도시로 개발되었으며, 2018년 경기도 남양주의 왕숙, 경기도 하남의 교산, 인천의 계양, 경기도 고양의 창릉, 경기도 부천의 대장, 경기도 광명과 시흥, 그리고 경기도 의왕-군포-안산이 3기 신도시로 개발되었다. 거의 대부분 비슷한 행정구역들인데, 그래서 이 지역 경기도 도시들을 주거 기능을 담당하는 위성도시라고도 한다.
주거 기능을 담당하는 위성도시라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고민해보기 위해 경기도 의왕과 성남으로 여행을 떠나본다.
의왕시는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이 되던 1914년, 경기도의곡면과 왕륜면이 통합되면서 앞글자씩을 따와 처음 '의왕'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독립적인 행정구역이 아닌 주변의 시나 군에 편입된 마을이었으나 1989년 시로 승격되면서 의왕시로 독립하였다. 워낙 작은 행정구역이긴 하지만 서울 근교라는 지리적 이점 덕에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왔고, 다만 신도시 혜택을 못 받던 중 지난 2018년 3기 신도시로 선정되어 주거기능의 위성도시로 앞코어카지노 계속 위상을 올릴 거라 생각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동네로서 주거기능을 담당해야 한다면 단순히 몸 뉘울 집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집 주변코어카지노 가까운 거리에 여러 가지 사회적 인프라가 조성이 되어야 하는데, 개인적코어카지노 그 중 '공원'이란 존재가 정말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많은 신도시들 주변에는 자그만한 인공 호수를 만들거나 근처 하천에 수변공원을 만들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의왕시는 유리한 점이 왕송호라든지 백운호라든지 자연친화적이고 봄이면 각종 생명력 강한 꽃과 식물들로 장식되는 호수들이 꽤 있는 편이다. 그 덕인지 날씨 좋은 때가 되면 의왕의 시민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지역에서 일부러라도 의왕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 특히 의왕레일바이크로 이름을 알린 왕송호수에는 봄이면 봄마다 흐드러진 벚꽃을 보러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 예약하기도 힘들 실정이다.
왕송호수는 인공호수이긴 하지만 각종 자연생태로 둘러싸여 있고 또 사계절 내내 철새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깨끗하고 청아한 곳이다. 이런 왕송호수를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의왕레일바이크를 타고 왕송호수를 한 바퀴 둘러보는 것이다. 의왕시는 '철도 특구'로 지정되어철도 관련한 시설과 기관들이 의왕에 집중되어 있다. 1985년 기존의 철도전문대학교가 의왕코어카지노 이전한 이래 1999년 철도전문대학교는 철도대학교로 격상되었고 2016년 한국교통대학교가 인수하면서 의왕시는 철도인력을 배출하는 양성소가 되었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기관인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 1996년 의왕에 자리를 잡았으며, 코레일인재개발원도 의왕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과 수원 사이에 위치한 의왕은 철도 특구로서 기능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치다. 우리나라 철도의 인재들이 자신들의 고향에 직접 만든철로로 왕송호수를 두르고 기분 좋은 봄바람을 맞을 수 있는 의왕레일바이크인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가 있는가. 국내 수많은 레일바이크들이 있고 경치 좋은 곳들도 많지만, 철도의 중심지에서 타는 레일바이크라면 더 뜻깊지 않은가!
레일바이크를 다 탔는데 다른 콘텐츠를 더 즐기고 싶다거나, 일찍 도착해서 레일바이크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현장 예매로 인해 시간이 뜨거나 한다면 인근에 있는 철도박물관을 방문하면 된다. 철도박물관은 한국철도공사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코어카지노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는 개화기였던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코어카지노 의정부 내 공무아문에 철도국이 신설되면서 시작하였다. (공무아문은 6조 중 공조가 철폐되고 새롭게 새긴 근대적 개념의 국가관청이었다) 한국의 첫 철도노선은 수도 한양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이었다. 처음 경인선 부설 및 공사는 당시 미국대사 겸 기업가였던 제임스 모스가 맡아 1897년부터 진행하였으나, 대한제국의 국력이 약하다는 미국의 판단하에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경영난에 허덕이던 제임스 모스는 결국 1898년 일본의 경인철도합자회사에 부설권을 양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 정부의 지원과 조종을 받는 경인철도합자회사가 경인선 공사에 착수하여 1899년 현재의 인천역과 한양의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었다.
그 다음 개통된 철도노선은 경부선과 경의선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국제분쟁이 격화되면서 언젠가 러시아와의 싸움을 대비하고 있던 일본은 훗날 일본군을 러시아 만주로 보낼 시 대한제국을 거쳐야 하고, 부산코어카지노 대한제국을 종단할 수 있는 철도노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고종황제를 설득하고 강요해서 1900~1901년 경부철도주식회사를 만들어 자금을 조달하였다. 1904년 결국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철도 건설을 더 빠르게 추진하여 1905년 부산의 초량과 수도 한양의 영등포 역을 잇는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경부선과 같은 목적 하에 일본군을 대한제국 북쪽을 거쳐 만주로 보낼 수 있도록 수도 한양의 용산 역과 평안북도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이 경부선과 같은 해였던 1905년 개통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제의 철도 노선 개통은 계속되었다. 1914년 수도 한양의 용산역과 당시 북쪽 동해안 항구 도시 중 가장 큰 규모의 경제공업도시였던 원산을 이은 경원선이 개통되었다. 본디 경원선은 일제강점기 이전 고종황제의 강력한 의지로 대한국내철도용달회사를 통해 공사를 추진하려고 했으나, 대한제국의 실정이 매우 어려워지면서 그 부설권을 일본에게 넘어갔고,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경부선-경의선에 집중하면서 다소 공사가 지연되어 일제강점기로 넘어갈 때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대한제국의 주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간 뒤 조선총독부는 다시 경원선 공사를 재개하여 1914년 개통되었다. 비슷한 경과 과정을 거쳐 경원선이 개통된 1914년 같은 해 대전과 전라도의 목포를 잇는 호남선이 개통되었다. 그리고 초창기 계획부터 조선총독부가 주도하여 1920년대 함경남도 원산과 함경북도 회령을 잇는 함경선을 개통시켰다. 이로써 조선총독부가 있는 경성에서 한반도 전국 곳곳으로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는 X자 철도를 완성하여 일제는 더 효과적으로 식민지배를 실행할 수 있었다.
해방 후 모든 철도노선의 운영이 비로소 우리의 손코어카지노 돌아왔지만, 남북코어카지노 분단이 되면서 수도 서울과 북쪽을 잇는 노선들은 운영이 중단되고 말았다. 경기도 북부나 강원도 북부의 폐역들은 대부분 분단이 되어 더 이상 역코어카지노 운영이 될 수가 없으면서 폐역이 된 경우들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기존의 철도노선 외에 산업화를 거치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기도 힘들 만큼의 철도를 만들어 세계적코어카지노도 꿇리지 않은 철도국가가 되었다. 비단 기차노선을 떠나서 지하철까지도, 선진국 출신의 외국인들조차도 서울에 오면 우리의 철도 역량과 조건에 연신 감탄하고 가는 걸 많이 목격했다.
철도박물관은 다음과 같은 역사를 옛 물건들을 전시하며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고, 지하철의 역사도 있으니, 옛 지하철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다.
둘째날부터는 성남으로 이동한다. 성남이란 '남한산성 남쪽'이란 뜻으로 본디 광주에 속해 있었으나 1973년 성남시로 독립하였다.커피로 둘째날을 맞이하고자 아침일찍부터 성남으로 이동한다. 커피로 아침을 맞는 여행은 가장 일상 같은 여행이고, 여행 같은 일상의 기분을 낼 수가 있다. 근래야 지방 곳곳에 카페골목이 있지만 그 시작은 성남시 분당구의 정자동카페골목이였다.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한 정자동카페골목은 성남시가 주거기능의 위성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많은 주민들이 몰리자 조성된 거리로, 여행지라는 느낌보다는 말 그대로 사람이 사는 평범한 동네이다.
특별할 것 없는 곳이지만 고상한 느낌에 취하며 에스프레소를 마시면 여행이 아닌, 일상의 여유라 착각해본다. 때로는 각잡고 여행을 떠나 찾는 여유가 아니라, 일상에서도 이런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괜시리 평소에 먹는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마신다. 핫한 관광지를 찾으면 여유를 찾을 시간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바쁜데, 이것이 관광지가 아닌 곳을 여행하는 매력이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마시는 음료는 커피가 아니다. 에스프레소든 아메리카노든 '커피로 만든' 음료이다. 커피는 커피나무에서 열리는 콩 그 원두 자체를 뜻한다. 커피는 적도가 지나는 곳과 그 부근인 열대 기후 지방, 조금 더 친다면 열대 기후와 온대 기후 사이 뜨거운 곳에서 자란다. 그래서 커피로 유명한 국가로는 동남아시아의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아프리카의 케냐와 에티오피아, 중남미의 자메이카, 브라질, 과테말라, 콜롬비아 등이 있다. 최초로 커피콩을 음료로 먹기 시작한 곳은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였으며, 각성 효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커피를 찾았다. 이 커피가 중동 지역코어카지노 퍼지고, 튀르키예에 있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커피가 유럽코어카지노 퍼지게 되었다. 유럽의 국가들이 대항해 시대 동남아와 중남미로 갔을 때 커피콩이 있는 것을 보고, 커피 재배도 유럽 국가들의 플랜테이션 품목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커피의 종주국 하면 이탈리아를 떠올리지만 이탈리아가 최초로 커피를 마시던 국가는 아니었다. 커피가 유럽에 전래됐을 때 귀족스러운 문화를 자랑했던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더 애용되었다. 다만 1884년 이탈리아 토리노 출신의 기업가 겸 발명가였던 안젤로 모리온도가 증압식 에스프레소 추출 머신을 발명하여 이탈리아에서 훨씬 더 쉽게 커피원두로 음료를 짜낼 수가 있어 보편화되었던 것이다. 빠르게 커피음료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안젤로 모리온도의 머신코어카지노 짜낸 커피를 에스프레소(Espresso)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press의 이탈리아어다) 이후 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로 들어온 미군들에게 카페인의 커피가 절대적코어카지노 필요했는데, 커피원두로 짜낸 에스프레소는 양이 지나치게 적고 씁쓸한 맛이 강해, 뜨거운 물에 에스프레소를 부어 양을 늘렸고, 그래서 미국인들이 먹는 커피라는 의미에서 '아메리카노'가 나타난 것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아메리카노를 절대 커피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에스프레소야말로 정통 커피라 자부한다. 어느 편에도 서고 싶진 않지만 에스프레소야말로 정통 커피고, 커피 본연의 맛을 느끼기 위해선 에스프레소를 먹어야 한다는 것엔 동의한다. 무엇보다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스스로 귀족이 되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코어카지노 분당에는옛 신해철의 작업실이 있던 동네 자리에 신해철거리를 조성해두었다. 지난 2014년 한국대중가요사에 획을 그었던 신해철이 의료사고로 별이 되고 말았다. 평소 신해철의 열렬한 팬은 아니고 대표곡 몇 곡 아는 정도이지만 그나마 아는 음악에서도 신해철이란 아티스트의 예술관이 강하게 담겨 있어서 언제나 멋지다고 여긴 아티스트였다. 신해철 음악의 멋과 철학을 아는 이들도 많아 신해철은 압도적인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던 음악인이었다.
1988년 MBC대학가요제에서 <그대에게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공연을 시작으로 신해철은 말그대로 혜성처럼 한국가요계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한국대중가요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데뷔 중 하나였다고 해도 이견을 두는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그대에게 세대'가 있을 정도였다고 평할 정도였다. 대학가요제에서 '무한궤도'라는 이름의 밴드로 데뷔하고 얼마 안 있어 신해철은 솔로 활동을 시작했고, 미소년 이미지 덕에 요즘 남자아이돌 저리 가라하는 소녀와 여성팬들을 거느렸다. 다만 그의 예술세계는 언제나 파격적이었다. 세태를 강하게 풍자하고 직설적이지만 또 한편으로 은유적인 가사로 음악 팬들의 환심마저 샀고, 대중과 예술을 모두 아우르는 몇 안 되는 아티스트 중 하나였다. 1992년부터는 'NEXT'라는 밴드를 만들어 기존의 미소년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강력하고 전위적인 사운드를 내세운 헤비메탈 음악을 하며 '마왕'이란 칭호로 불렸다. 그대에게 세대 이후 세대에겐 신해철을 '마왕'으로 알고 있고 미소년의 신해철을 떠올리기가 힘들 만큼 '마왕'의 이미지는 이후 신해철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1998년부터 다시 솔로활동을 재개하다 2003년 'NEXT'를 부활시키며 그의 음악세계에는 한계란 없다는 듯이 또 한 번 새로운 음악세계를 선보이며 그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이후로 꾸준히 개인이든 밴드이든 음악활동을 이어갔으나 2014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해철의 음악관에는 그가 촌철살인코어카지노 세태를 바라보는 세계관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신해철은 가수들 중 최초로 100분 토론에 나와 음악인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놀랄만한 세상에 대한 이해도와 깊은 통찰력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손석희 앵커도 100분 토론의 패널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사람코어카지노 노무현 대통령보다 신해철을 꼽을 정도였다. 100분 토론 외에도 그가 예능을 포함한 다양한 방송에서 수많은 명언과 어록을 남겼다. 특히 청춘과 청년 세대를 향한 어록들이 많았는데, 내가 신해철의 세대는 아니지만 신해철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깊은 위로를 받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저 형식적인 위로가 아닌 청춘과 청년이 겪는 방황을 누구보다 가까이 공감해주고 곱씰을 수록 의미가 강해지는 메세지를 던져주었다.
신해철의 음악 스펙트럼이 워낙 넓었기 때문에 그의 예술론을 오로지 음악성 하나로만 평가하기도 어렵다.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 신해철 음악의 위대한 예술성을 논하긴 힘들지만, 그래도 그의 그 다양한 장르를 뚫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사는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감동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의 사망 후 수많은 동료 음악인들과 연예인들이 그를 추모한 글에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음악이 어떻게 남아있는지를 증명해주고 있다.
"신해철, 청년코어카지노 살았고 소년코어카지노 떠났다." - 박완규
"사춘기를 평화롭게 해줬던 뮤지션이자 철학자." -서문탁
"그가 남긴 음악은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조용필
"해철이 형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살았던 이 시대의 진정한 로맨티스트다." -션
"이 사회 여러 금기를 훌쩍 뛰어넘는 용감한 운동가였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를 '시대의 예술가'라 부릅니다." -문성근
"신해철은 ROCK의 모짜르트다." -김태원
"그 분은 정열의 시인이자 전위적 작곡가였습니다." -하현우
"힘껏 과거를 끌어안고 뜨겁게 현재를 살다 홀연히 미래로 떠난 불멸의 아티스트.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건 우리 모두에게 큰 행운이었다." -조승원
신해철거리에는 그가 남긴 어록들이 새겨져 있다. 글들 하나하나 음미하며 그의 세계를 접하며 나는 한 번 더 삶의 위로를 받는다.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내가 꿈꾸는 것을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기를 바라며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는 인생. 나도 그런 인생을 살아겠노라 다짐해본다.
"나에게 음악이라는 것은 내 인생의 반영이고, 내 삶의 그림자이고, 내가 어떤 모습코어카지노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것이 벽에 비춰져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그림자다." - 신해철
식민지의 역사와 해방 후 곧바로 이어진 분단, 그리고 전국을 황폐화시킨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네 주택 문화는 한창 동안이나 전근대적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주택 문화가 60~70년대 산업화를 통해 급격하게 현대화되었고, 오늘날 주택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급격한 주택 산업화와 현대화에 한국현대사의 흑역사들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이 광주대단지 사건이다. 명칭이 '광주대단지 사건'인 것은 당시 행정구역명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난 일이라 그렇지만, 실제로 이 비극사의 현장은 현재의 성남이었다.
60년대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도시로 집중되는 인구비율,특히 수도권코어카지노 집중되는 인구비율은 기하급수적코어카지노 늘어났지만당시 코어카지노시는 이 수많은 인구를 수용할 역량이 부족했다.가장 심각한 문제는 주택문제였다.돈을 벌기 위해 코어카지노로 상경한 노동자 계층들이었기에 거주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충분한 자금이 부족했고, 상경한 노동자 계층은동네의 비탈길이나 언덕길에 판잣집을 대충 만들어놓고 살고 있었다. 서울 시내 비탈길과 언덕길이 판자촌코어카지노 뒤덮히자 판자촌 문제는 정부에서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하는 주택 문제였다.서울시코어카지노는 판자촌을 철거하고 판자촌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주택을 공급하겠다는 취지로 시민아파트를 세우지만부랴부랴 세우느라 태반이 부실공사였다. 하지만 이 부실공사된 시민아파트조차 그 분양가를 판자촌에서 생활하던 노동자 계층들의 경제력코어카지노는 맞출 수가 없었다.시민아파트는 판자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실제로는 중산층들이 들어가는 아파트가 되었고,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은 그저 생활터전을 잃기만 했을 뿐이었다.
판자촌 사람들을 어떤 식코어카지노라도 구제하고 해결해야 했던 정부는 판자촌을 밀어버려 살 곳을 잃은 사람들을서울 변두리 혹은 근교 쪽코어카지노 이주시켰다. 정부와 서울시에서 가장 먼저 정한 곳은지금은 코어카지노시이지만 당시에는 광주군이었던 남한산성 밑 비탈길이었다.정부는 이곳에 임시거주지를 만들어놓고 판자촌에 살던 사람들에게는일정 기간만 이곳에 머물면 근처에 아파트를 마련하고싼 이자로 분양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서울에 살던 그 수많은 무허가 판자촌 사람들이 서울코어카지노 터전을 잃고 전부 남한산성 밑 비탈길로 모이니, 그 규모가 자그마치 10만 명이었다.1969년 9월 1일부터 광주 이주가 시작했다.10만 명이 모인 남한산 기슭 비탈길 동네를 광주대단지라고 불렀다. 물론 강제 이주된 경우도 상당수였다.그냥 야밤에 군용트럭이 와서 코어카지노시내 판자촌에 있던 사람들을강제로 태워 광주대단지로 후송했고기존의 판잣집은 그대로 철거해버렸다.
임시거주지인 광주대단지에 도착해보니 정말 아무것도 없고 텐트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텐트마저도 10만 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도 아니었다.별수 없이 사람들은아무렇게나 겨우겨우 집 같지도 않은 집을 자체적코어카지노 만들었다.서울이 아닐 뿐 다른 지역에 그들은 다시금 판자촌코어카지노 돌아온 것이다. 상하수도, 포장도로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광주대단지가 사람이 살기 부적합한 비탈길이다보니 여름철 장마나 태풍, 그리고 겨울에 눈이라도 내리면 판자집이나 텐트가 쓸려나가기 일쑤였다. 그 외에도 광주대단지 사람들은여름철 전염병과 부패현상, 겨울철 추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조금만 더 판자촌코어카지노의 삶을 버티면 저렴한 아파트라도 분양해준다고 하니 판자촌 사람들은 희망을 갖고 버티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부와 코어카지노시 등 당국은 이 판자촌 사람들을 내팽개쳤다. 당시 행정당국의 기본 방침은“인구 10만 명이 모이면 가만히 냅둬도 알아서 자급자족이 가능해진다” 였다.서울코어카지노 쫓겨나온 철거민도 철거민이지만부동산 브로커들한테 사기당해서 광주대단지로오게 된 일반 입주자 비율도 상당했다.조선일보코어카지노는 ‘산산이 깨진 낙원의 꿈, 난민들은 서럽다’라는 제목과‘생활터전 없어 시내로, 교통 불편하고 공공시설 마련 안 돼’ 라는 부제를 달아 기사를 내기도 할 정도로 광주대단지의 주거환경은 심각했다.1969년 이주하기 시작해 1971년이 되면그 수가 15만 명을 넘어섰고, 15만 명 중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취직자는5%에 불과했다.
여기서 행정당국이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해버렸다.경기도청코어카지노 이 광주대단지 판자촌민들에게토지세 납부 고지서를 보내버린 것이다.원래 토지세는 광주로 이주하기 전토지대금 이름코어카지노 납부하기로 상호합의하였지만 정작 아파트를 만들어지지 않고 계속 판자촌에 살게 하면서 토지세를 턱하니 들이민 것이다.심지어 고지서에 적힌 토지대금 액수는처음 약속된 액수의 몇 배는 더 높은 가격에 일시불을 요구했다.광주대단지에 살던 사람들은 전성천 목사를 중심코어카지노 1971년7월 17일 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토지대금 인하와 납부일 연장, 그리고 취업 알선 등이전에 당국코어카지노 약속했던 바를 제대로 이행해달라고 진정서를 보냈는데경기도청은 해줄 것처럼 하더니 시간이 지나며 입을 닫았다.
오히려 경기도청은 세금을 더 올리자시정대책위원회는 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1971년8월 10일 3~6만 명의 주민들이 대궐기에 나섰다. 시위대는경찰과 대치하며‘배가 고파 못살겠다’‘일자리를 달라’‘우리의 대변자 국회는 잠자는가?’‘백원에 산 땅 만원에 파는 폭리를 하지 말아라!’라는 표어가 적힌 플래카드를 걸고애초 약속했던 공약 이행과과중한 세금과 토지대금 인하, 주택문제 해결 등을 강하게 외쳤다.
시위가 격해지자 양탁식 코어카지노시장이 중재에 나서기로 하였다.광주대단지 주민들은 양탁식 시장의 중재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양탁식 시장이 약속했던 시간보다 늦자 또 거짓말을 했다고착각한 주민들은 더 이상 참지 못했고,그들의 분노는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시위대는코어카지노파출소, 출장소, 사업소 등을 무단점령 후 관공서 파괴 및 방화를 저질렀고경찰들조차 이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그리고 공무원용 트럭을 탈취해서 광주대단지를 돌아다니며 시위행렬을 이어나갔다.코어카지노출장소 건물 1동과 서울시 광주대단지사업소 유리창과 기물이 파손되었고,차량 피해는 22대로 이 중 4대 소실, 시영버스 5대 대파, 소규모 파손이 13대였다.
늦게나마 도착한 양탁식 코어카지노시장과정부가 부랴부랴 투입한 경기도지사와 내무부 차관까지 동원되어위원회 간부들과 만나 주민들의 요구를 무조건 들어주겠다며구호양곡 확보, 생활보호자금 지급, 도로 확장, 공장 건설, 세금 면제 등을 약속해주었다.이 주민들을 달래는 일환코어카지노 광주대단지가1973년 지금의 코어카지노시로 분리독립하였다. 다만엄연히 관공서 파괴 및 방화는 심각한 범죄이기 때문에시위주동자 22명은 징역 2년 이하의 형사처분을 받아야만 했다.
이 사건이 광주대단지사건이다. 현재 학계코어카지노는 광주대단지사건에 대한 명확한 해석을 합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지 '사건'이라고 부르고 있다.2021년 3월 코어카지노시는 이 사건을‘8·10코어카지노(광주대단지)민권운동’으로 공식명칭을 제정했다.광주대단지사건이 터지기 1년 전, 서울의 마포구코어카지노는 와우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건이 있었다.1970년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1971년 광주대단지사건은산업화와 도시화의 이면,주택문제의 병폐와 그림자를 상징적코어카지노 드러내는 한국주거사의 흑역사로 남아 있다.
성남 여행의 마지막은 전통민속시장이다. 역시 하나의 마을이,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려면 인구를 유동시켜야 하고, 상권 조성만큼 사람들의 교류를 활성화하는 것이 또 없지 않은가! 성남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 수도권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속시장인 모란시장이다. 모란시장은 매월 4일과 9일로 끝나는 날(4일, 9일, 14일, 19일, 24일, 29일)에 열리는 5일장이다. N일장이란 N일동안 열리는 시장이 아닌 N일마다 열리는 시장을 뜻한다.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은 1962년 처음 문을 열었으나 그 명성은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거대화되었다.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을 전국적인 규모의 시장으로 발돋움시키도록 한 인물이 있으니 바로 모란개척단의 김창숙 씨다. 1962년 문을 열었다고 하지만 문을 열었을 직후에는 '모란'이란 명칭이 없었다. 김창숙 씨는 6.25한국전쟁 당시 월남하여 국군에서 싸웠던 대령 출신의 군인으로, 전쟁이 끝나고는 성남 지역의 개발 및 분양을 위한 조직 '모란개척단'을 만들었다.성남의 도시화를 위해 모란개척단에서는 기존의 성남민속시장을 5일장으로 확대하였고, 도시개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시장을 지원하여 지금의 모란시장을 만들었다. '모란'이란 이름을 붙인 것도 그의 고향이었던 평양에선 '모란'이 어머니의 상징과도 같은 꽃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모란시장의 명성을 알린 사람들도 실향민들이었다. 1.4 후퇴 당시 미군들은 자신들을 따라온 이북의 실향민들에게 지금의 천호동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주었는데, 천호동이 성남과 인접해 있어 천호동의 실향민들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을 자주 찾으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규모도 더 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의 명성 확산에 또 하나 크게 기여한 것은 시장에서 파는 물품이었는데,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은 한때 전국에서 가장 큰 식용 개와 식용 고양이를 판매하던 시장이었다. 다른 역사가 유구한 곳에서도 그 정도의 규모를 볼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시장 내에 개 도축시설도 마련되어 있을 정도였다. 다만 최근에는 시대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식용 개와 식용 고양이 판매를 금지하였고, 이제는 그 흔적을 찾을 순 없다. 그럼에도 일부 구역에서는 식용 개와 고양이까지는 아니지만, 특이한 동물로 만든 보신용 약재를 파는 경우가 더러 있다.
최근 들어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이 젊은 세대에게도 인지도를 쌓았는데, 각종 SNS와 유튜브 채널에서 코어카지노모란시장에서만 파는 무한리필 돼지고기부속가게들이 알려지면서 여행이나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으로 이미지가 생겼다. 언제부터 코어카지노모란시장에서 돼지고기부속가게가 생겨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애당초 이 가게가 젊은 세대를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기성세대를 위해 만들어진 곳인 만큼 사실 젊은 세대에 그렇게 친절한 곳은 아니다. 크나큰 철판에 냅다 돼지고기부속들을 쏟아놓고 알아서 구워지면 알아서 먹는 시스템이라 좋은 고기를 쓴다는 보장도 없고 위생도 썩 깨끗한 편이 아니거니와, 일행 구분 없이 그저 이 식당을 찾는 사람들끼리 다닥다닥 붙어서 먹어야 하는 불편함도 있다. 그렇지만 나 같은 술꾼들은 술 하나만 시키며 무한정 먹을 수 있으니, 음식 가리지 않는 나로서는 취향에 딱 맞다. 아울러 역사가 오래된 시장임에도, 그리고 한때 불편한 이미지를 가졌던 모란시장이었음에도 이렇게라도 젊은 세대가 자주 찾으며 시장의 역사가 더 진행될 수 있는 일은 반가운 일이다.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의 역사는 전쟁 이후이지만, 그 자리는 아무런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코어카지노모란시장은 조선 후기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민속시장의 연속상에 있다고 보고 있다. 조선 후기는 이앙법의 발달로 농업생산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고 잉여생산물을 내다 팔면서 상업이 촉진되었던 시기였다. 이제는 자급자족이 아닌 시장에 내다 팔 목적으로 상품작물을 재배하였고 상업이 활성화되니 굳이 농산물이 아니어도 여러 가지 품목들이 돌면서 자본주의가 맹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상업이 발달하였다. 양반보다 경제적 능력과 재산이 훨씬 웃도는 상인들이 등장하면서 신분제가 동요할 정도의 경제적 변화였다. 지방 각지에는 거상들이 출현했다. 상인들의 직장은 '시장'이다. 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했다는 건 한양에 그만큼 여러 시장들이 생겼다는 뜻이고,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한양의 사장들을 조선후기 15대 시장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시장들을 '장시'라고도 부른다) 이중 수도권 동남쪽의 대표적인 시장은 송파장이었다. 송파장은 지금의 남한산성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상권이 점점 확대되다가 한강이 가까운 인근 잠실 일대로 옮겨갔다. 즉 지금의 잠실~남한산성 주변의 광주와 성남 일대는 조선 후기 때부터 일찌감치 오랫동안 큰 규모의 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일제강점기 도로가 놓이고 상권의 중심이 도로 위주로 몰려 송파장의 규모는 작아지나 싶더니, 1925년 잠실 일대의 대홍수로 인해 송파장이 중단되고 말았다. 송파장의 소멸과 모란시장의 형성까지 약 40년의 시차가 존재하지만 모란시장은 송파장의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다. 모란시장의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구경하면서 조선 후기 상업의 발달까지 연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오늘의 모습에서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의 훌륭한 공부방법일 것이다.
이제 집은 부자들의 재테크 수단이 되거나 청년들은 자가를 꿈도 꾸지 않는 것이 되었다. 주거의 의미와 형태는 역사의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기에 변화된 의미에 대해 가타부타 긍정적이라거나 부정적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순 없겠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든 긍정적 결과와 부정적 결과를 동시에 배출하는 법이니까. 다만 주거에 담긴 우리의 정신과 가치는 항상 짚어봐야 한다. 우리는 현재 어디서든 어떠한 형태로든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주거의 현태는 우리 한국현대사의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근대화를 거치며 얻은 투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어디서 사는가는 어떻게 사는가를 가시적코어카지노 물질적코어카지노 나타나는 수단이기도 하다. 내가 어떠한 형태로 어떤 공간에서 살든, 그 공간에 저마다의 가치를 투영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또 하나 주거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만 살고 있지 않다. 누구와 부딪히며 사는가 또한 주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주거공간은 오로지 주거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내 주거공간과 인접해 있는 타인의 주거공간, 주거 공간 바깥의 다양한 시설들. 교통, 근무공간, 시장, 상권, 여유를 책임져주는 구역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내가 사는 곳' 아니 '우리가 사는 곳'이 형성된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곳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선형코어카지노 누적되어 온 궤적이 인류가 만들어 온 역사일지도 모른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윤흥길<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윤흥길 작가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는 광주대단지 사건을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입니다. 윤흥길 작가는 70년대~8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집필한 조세희 작가와 더불어 한국의 노동문제를 한국의 현대소설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는 광주대단지사건으로부터 6년이 지난 1977년 발표된 작품으로 주인공이자 관찰자의 시선으로 나오는 오 선생이 광주대단지 사건에 억울하게 휘말려 전과자가 된 권씨를 세입자로 받는 내용이죠. 단편소설인 만큼 광주대단지 사건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진 않지만 소설의 중요한 배경으로 나오며, 광주대단지 사건을 넘어 한국의 60-70년대 주거문제가 한국 산업화와 도시화의 이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회적 문제였다는 것을 여러 가지 층위의 이야기들로 엮어 제시하고 있죠. 나라는 발전하는데 소시민은 고통 받았던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웠던 면모를 '집'이란 테마로 풀어내는, 현대사적으로도 그리고 문학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띄는 단편소설이죠. 소설의 제목 '아홉 켤레의 구두'로 상징되는 정서와 은유를 곱씹어보시길 바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
아마 많은 분들이 이미 어디서나 봤거나 최소한 들어본 영화라 생각됩니다. 한때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와 함께 '겨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본영화의 양대산맥이었죠. 일본의 아주 작은 역사인 호로마이 역. 그곳에선 평생을 고집스럽게 철도원으로 근무해 온 오토 아저씨가 있습니다. 하지만 호로마이 역을 찾는 사람이 거의 사라지면서 호로마이 역을 폐역 조치한다는 지침이 떨어지고, 오토 아저씨도 이제 며칠 안 남은 은퇴를 기다리고만 있죠. 은퇴까지도 평소처럼 호로마이 역에서 근무하시는 오토 아저씨는 지난 40년 간 호로마이 역에서 일하며 겪었던 일들을 회고합니다. 사랑했던 가족의 상실, 가족 같은 인연의 만남 등 오토 아저씨는 그 지나간 세월에 대해 죄책감과 뿌듯함과 미안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며 점점 더 쇠약해져 갑니다. 영화에서 철로라는 메타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 같습니다. 역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는 구성도 사랑스럽기 그지 없고 다 끝나면 가슴 한 켠이 뭉클해지죠. 영화 <철도원은 지나가버린 과거를 아주 소중한 기억보관함에 고이 모셔놓는 영화입니다. 지나가버려 사라진 것들도 그리움만 있다면 영원히 빛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