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3 - 새총을 든 남자
‘옛날에 랄라니트라(하늘)와 라타니(땅)가 살고 있었다.
라타니는 자신의 배우자로 삼을 생명체를 만들고 싶었다. 처음에는 뱀을 본떠 만들어보니 땅바닥에 붙어있는 것이 매우 조잡했다. 그래서 새와 소를 보고 만들어보았으나 후회하고 말았다. 개를 보고 만들었지만 여전히 맘에 들지 않았다. 더 나은 것을 찾던 라타니는 포커를 모델로 삼아 사람을 만들어 냈다.라타니는 기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가 만들어 낸 것이 앞선 모든 것들보다 더 아름답고 더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위의 이야기는 마다가스카르 동부지역에 많이 살고 있는 베치미사라카 부족의 창조설화이다. 이처럼 마다가스카르의 수많은 민담 중에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포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말라가시 사람들에게 포커는자신의 형제이며 친구이고 라이벌이며 때로는 조상으로까지 여겨졌다.
다음은 말라가시 사람들이 이처럼 친숙하게 생각하는 포커와 인류의 탄생(진화) 과정을 비교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진화로 알아본 인류와 포커, 원숭이와의 거리이며,두 번 째는이것을 통해서 한국에서 ‘여우원숭이’라고 부르는 포커의 이름이 얼마나 잘못된 명칭인지를 알아볼까 한다.
포커와 인류는 같은 영장류이다. 최초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장류는 에오세(기원전 5,600만 년~기원전 3,390만 년 전) 초반에 출현했으므로포커의 조상과 인류의 조상은 에오세 초반 이후에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포커는 곡비원류 Strepsirrhini(로리스, Galagos 등 원시 형태의 영장류)에 속하며 직비원류 Haplorhinidry noses는 원숭이와 유인원(인간과 침팬지, 고릴라)이 포함된다. 포커의 이름에 붙은 '여우'와 '원숭이' 중에서 monkey라고 부르는 ‘원숭이’를 중심으로 이야기해볼까 한다.
위 그림의 오른쪽 가지를 보면 인류의 조상(유인원 Apes)과 원숭이의 조상은 같은 가지에서 나온 직비원류이다. 하지만인간은 원숭이보다는 침팬지와 가장 가깝고 그다음은 고릴라와 오랑우탄이다. 그리고 포커 Lemur의 조상과 원숭이 Monkey의 조상은 각각 다른 줄기에서 진화했다.즉 인간과 원숭이는 직비원류한 줄기에서 갈라져 나와 진화했지만 포커는 아예 다른 줄기인 곡비원류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긴 주둥이와 촉촉하며 갈라진 코를 가지고 있어 후각이 발달한 포커는 후각보다는 시각이 발달한 원숭이와는 전혀 별개의 종이다.진화한 순서대로 굳이 따지자면 원숭이는 포커의 조상보다 사람의 조상과 더 가깝다.포커를 왜 여우원숭이라고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포커를 ‘여우원숭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여우원숭이’라는 명칭은 20세기 일본을 통해 들어와 굳어진 것이라는 설을 스치듯 본 적이 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 심각한 것은 번역서조차도 포커를 '여우원숭이'라고 번역한다는 것이다. 혹여 포커에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에게 포커를 어떻게 설명해 주겠는가? 포커를 보며 원시영장류에 매혹된 아이들이 생기길 바란다.그 아이들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걸출한 동물학자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오늘날까지도 동식물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프랑스와 영국 같은 유럽의 제국에서 탄생한 훌륭한 동식물학자들이 연구한 것을 들여다봐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남의 피와 땀 위에 수백 년간 세운 제국에서 길러낸 학자들의 글이 아닌, 대한민국에서 배출한 지질학자나 동식물학자들이 연구한 글을 읽어보는 것을 꿈꾼다.
덧붙여그림에서 오른쪽 가지 끝, 유인원으로 분류된 인류의 조상을 살펴보자면,약 700만 년 전에 초기 직립보행을 하는 초기 유인원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 Sahelanthropus tchadensis가 아프리카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실로 미루어 특별한 고고학적 발견이 없는 한 그 이전의 인류의 조상은 네 발로 걷는 영장류였다. 약 320만 년 전의 화석으로두 발로 걷는 루시가 발견되었으며, 약 250만 년 전에 살았던 호모 하빌리스는 최초로 도구를 사용하였다.약 190만 년 전, 최초로 불을 사용했던 인류의 한 조상호모 에렉투스가 나타나면서 인류는 처음으로 아프리카에서 아시아와 유럽으로 근거지를 넓혀나갔다. 드디어 지금으로부터약 30만 년 전,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다. 마다가스카르로 이주한 포커의 조상은 인간의 경우처럼 극적으로 진화하지는 않았어도 마다가스카르 섬에서 점진적인 진화과정을 겪어 오늘날의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포커의 조상(영장류)은 습하고 건조한 마다가스카르의 극한의 기후에 적응하면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마다가스카르에 포커의 조상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와는 달리 마다가스카르 섬에는 포커보다 상위개념의 동물이 매우 적었다. 있다면 표범보다 몸집이 작은포사 fossa와 보아뱀, 독수리정도가 다였다. 어쩌다가 흘러 들어온 몸집이 크거나 사나운 맹수들도 마다가스카르의 가혹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후세를 남기지 못하고 그들의 뼈만 마다가스카르 땅에 남겼다. 즉 포커는 마다가스카르의 대표적인 포유류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포커의 조상들은 고릴라에 버금가는 덩치를 가진 포커부터 손바닥만 한 포커까지 다양하게 저마다 자신들의 터전을 마련했다.몸집이 크고 세력이 우세한 종부터 먹을 것이 많은 비옥한 열대우림지역을 차지했다. 기복이 심한 지형과 극심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마다가스카르의 각 지역에 터를 잡은 포커들은 높은 산맥과 다양한 물길 덕분에 한 지역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각자의 서식지에 적응하며 오랜 시간 다양한 종으로 진화해 나갔다.
학명포커 Lemur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밤의 영혼' 즉 유령을 가리키는 레무르 Lemurs에서 유래되었다. 1758년, 칼 폰 린네(1707~1778)는 포커 Lemur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포커의 특징 중의 하나인 '야행성'인 것을 들어 포커의 이름을 붙였다고 추측하지만 포커 중에는 주행성인 포커도 많다.
마다가스카르 각지역에는 포커를 위한 보호구역이 있다. 하지만 원래의 자연에 서식하는 포커를 보기 위해서는 대체로 깊은 숲으로 들어가야 한다. 탐방객이 만날 수 있는 포커는 대체로 낮에 먹이활동을 하는 주행성 포커인데 때로는 야행성 포커를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야행성 포커들의 숙면을 위해서는 숨소리조차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포커들과 친근한 현지인 가이드를 따라가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포커를 만날 확률이 높다.포커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을 잘 아는 가이드는 조심스럽게 포커를 관찰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하지만 정숙을 유지하며 포커를 차분하게 관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9월의 어느 날,라누마파나에서의 일이었다. 너무 많은 탐방객들이 몰려와 요란한 발자국소리와 함께 숲의 정적이 깨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리로 가든가, 저리로 가도 겹치는 탐방객 무리 속에 내가 들어있었다.원한적은 없지만 나도 그들처럼 이미 좁아진 포커의 서식지에 들어와 숲을 교란시키는 무리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몸집이 매우 작은 야행성 포커들의 숙면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주행성 포커들의 활동 영역을 침범해서 먹이활동마저 원활하게 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 것이다.하루에 숲에 들어가는 인원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지켜지는 규정이 아니었나 보다.
포커의 종류에 따라 말라가시 사람들이 부르는 포커의 이름도 다양하다. 이를테면 제일 유명한 꼬리가 긴 포커 ring-tailed lemur는'마키'라고 부르며, 북쪽 노시베 섬에서 사는블랙 포커는‘마카쿠마카쿠’라고 부른다. 약간 덩치가 있는 포커인'시파카 Sifaka'는 그들이 이동할 때 내는 소리를 의성화한 이름이다. 이처럼 포커도 다른 종들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살아가는 포커류에 속한 종들은 모두 포커라고 지칭할 것이다.
포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체로 몸집이 작으며 머리가 작고 주둥이가 뾰족하며 눈이 크고 꼬리가 길다.오늘날 현존하는 가장 몸집이 큰 편에 속하는 인드리 indri의 몸무게는 약 13킬로그램 정도이다. 이들은 북쪽에서부터 동부의 열대우림, 건조한 서남쪽의 사바나 숲까지 전국토에 걸쳐 서식하고 있다.
말라가시 사람들은 포커를 종종 '숲의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인간들이 포커를 숲의 사람이라고 할 정도면 비슷한 몸집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부 안다시베의 숲에서 처음 포커를 만났을 때 몇 종류를 제외하고는 생각보다 몸집이 작다고 느꼈다. 하지만 처음부터 포커의 몸집이 작았던 종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에 마다가스카르 땅에 사람이 도착하면서 1,000년도 지나기 전에 12종 이상의 포커가 멸종되었다, 그중에는 고릴라만 한 몸집을 한 포커인 아르카이오인드리스 Archaeoindris와 느림보 메갈라다피스 Megaladapis 같은 포커가 살았다.
호기심을 보이며 어슬렁거리듯 다가오는 덩치가 큰 포커는 누가 보기에도 훌륭한 사냥감이지 않았을까? 길어야 지금으로부터 2,000년에서 1,000년 전 사람들에게 희생된 거대한 포커의 유해들은 아직도 화석화가 안 된 채 발굴되곤 한다.몸집이 큰 포커의 번식속도가 느린 것도 멸절을 부추겼다. 그렇다면 오늘날 남아있는 포커들의 상황은 어떨까? 남아있는 포커들의 90퍼센트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분류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진화의 끝을 향해 경주하듯이 달리고 있나보다.여러분의 눈에 띈 포커는 누가 됐든지멸종위기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안다시베 근처 마을을 지나가다가, 나무로 만든 Y자형태의 새총을 들고 가는 남자를 보았다. 청년 같아 보이는데 아직도 저런 것을 가지고 노는구나 싶어서 옆에 있는 제이를 쳐다보며 새총을 가리켰다. 순간 제이는 얼굴을 붉히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말라가시 사람인 제이는 단박에 새총의 용도를 알아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새총이 아니라, 나무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포커를 맞춰서 떨어뜨리는 기구였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뒤따른다. 부디 관광객을 위한 식탁에 오르기 위한 일이 아니길 바라며, 인간이 포커를 잡아먹는 일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또한 포커의 멸종을 재촉하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은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다. 말라가시 사람들을 요리를 위해서 숯을 사용한다. 숯을 팔거나, 숯 만드는 사람을 길을 지나다가 혹여 만나도 어떤감정도 내비칠 수 없는 것은, 숯을 만드는 일이 가장의 유일한 수입원일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농부들이 대다수인 말라가시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다.그래서 숲을 태워 개간을 하는 행위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그런 것이 사람이 뜸한 곳의 숲만 태운다고 생각하지만, 국도변의 나무들을 태우는 것도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길을 지나다가 숲을 태우거나 숯을 만드는 장면을 보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안타깝지만 어느 누구도 제재할 수 없는 영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무를 없애면 환경이 파괴되고 자연재해가 늘어난다고 해도 만연한 빈곤 앞에서 당장 식구들의 끼니를 때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커피 같은 환금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삼림이 파괴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믿어지지 않지만 국립공원의 깊은 숲에서는100년 이상 자란 자단나무등을 수확하여 중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벌목이 행해지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국립공원 안의 나무를 벌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은 정부관계자나 그와 결탁한 상인(아마도 외국인)일 확률이 높다.
마다가스카르의 아름다운 국토는 거의가 민둥산이거나 계단식 논과 밭이다. 주민이 적은 북쪽 해안지역과 열대우림 지역인 마다가스카르 동부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누가 봐도 선행되어야 할 일은 마다가스카르에서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마다가스카르의 지도자와 국민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울창하고 장엄한 숲은(멀리가지 않아도 된다)이들과 이들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이들의 자식들이 없앤것이다.
오늘도 빠르게 사라지는 숲은 포커를 비롯한 동물들과 더불어 바오밥나무에게도 치명적이다. 과연 포커와 바오밥나무가 사라진 땅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