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큰 올케케이플레이가 될 뻔했는데...”
고향을 방문했던 우리 세 자매가 진희케이플레이에게 한 말이다.
옛날 그녀의 집에서 지금 살고 있는 그녀가 “그랬으면 과부 됐지 뭐...” 남 얘기하듯 말했다.
세 자매의 고향 방문에 동행한 둘째 올케케이플레이가 “아이구, 우리 동서가 될 뻔했네요!” 하자 우리 세 자매가 웃었고 진희케이플레이는 얼굴을 돌려버렸다.
이 얘기는 그만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배려이리라.
나는 마당을 내다 보며 저 자리에 앵두나무가 있었는데 홍매화를 심으셨네요 말했다.
진희케이플레이는 큰케이플레이의 어떤 면에 이끌려 케이플레이를 사랑했는지의문이긴 했다.
“나 토낄 거여.”
셋째 오빠에게 말하고 신작로와 맞닿아 있는 비탈길을 급히 내려가던 큰케이플레이의 뒷모습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셋째 오빠 품에 안겨 아랫말 경호네 바깥마당에서 동네 청년들이 하는 배구대회를 구경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큰오빠가 중학교를 졸업한 해라고 들었으니 열일곱 살이고 그보다 열두 살 아래인 나는 다섯 살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둘째 셋째 케이플레이가 조금씩 돈을 넣어 모아둔 돼지저금통을 그가 뜯어 윗마을 그의 친구에게 줘버린 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그에게 그 돈 당장 받아오라고 호통 쳤고 그 길로 그가 도망간 거라는 걸 내가 조금 커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서울로 간 큰케이플레이는 S호텔에서 일하고 있었다. 넷째 케이플레이가 가서 그를 만나기도 했고 그는 넷째 케이플레이 편에 딸기잼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기간이 길진 않았다. 그리곤 또 어디로 갔는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어머니는 자주 큰오빠 이름을 부르며 우셨고 큰 케이플레이는 걔가 이렇게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혹시 제주도에 있는 건 아닐까 말했고, 그의 군대영장이 나오면 아버지는 큰 글씨로 ‘행방불명’이라고 써서 돌려보냈다.
어디에서든 누구든 살아있는 한 세상은 영원한 도망자로 두진 않는 모양이다.
어느 날 큰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5,16 군사정변 후 군 기피자 자진신고 기간에 군 입대를 피할 길 없던 그가 소식을 준 것이다.
그는 가끔 큰케이플레이가 혹시?라고 말했던 제주도에 있었다. D호텔에서 일한다고 했다. 서울 호텔에 있다가 소식이 끊긴 지 팔 년만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오 학년이 돼있었다. 그때 케이플레이님은 서울에서 장사를 하고 계셨고 우린 아직 고향에서 형제들끼리만 지내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계신 케이플레이님을 먼저 뵙고 고향집으로 왔다. 파출소에 가서 군 기피자 자진신고를 해야 했기에.
라디오와 귤, 커피를 가지고 나타났던 그를 귀향 초반엔 봐줄 만했으나 그의 본색이 드러나자 나의 마음은 그에게서 멀리 달아나버렸다.
그는 늘 술을 마셨고 작은 케이플레이는 그의 술상을 차리느라 바빴다.
잠을 잘 땐 모로 누워 양 무릎을 구부리고 가슴에 붙여 새우의 모습 같았다.
남녀의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든 어느 틈으로든 비집고 들어오기 마련이다.
그는 아랫마을 마당 예쁜 집에 사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심하게 불편한 연상의 진희케이플레이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어머니가 서울에서 내려와 어머니의 친구이기도 한 진희케이플레이의 어머니를 마을 입구 주막으로 불러내 “난 니 딸 내 맏며느리로 못 받아들인다.” 말하고 서울로 다시 올라가셨다.
진희케이플레이의 어머니는 서슬 퍼런 어머니 앞에서 도리 없이 알았다고 대답은 했으나 그동안 그래왔듯 밤이면 당신 집 윗방에다 그들끼리 사랑 나눌 깨끗한 이불을 펴주었다.
그 봄에 진희케이플레이네 울안엔 앵두꽃이 환하게 피었었다.
그녀의 집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계속됐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저녁 무렵 우리 집 사랑채에서 진희케이플레이의 무릎을 베고 누워 울고 있는 오빠의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으니까.
그가 군 입대를 했다.
휴가를 나오면 그는 진희 케이플레이 네 집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그가 군 제대를 할 무렵 진희케이플레이는 서울로 올라가 그녀의 오빠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직원들 밥을 해주게 되었다.
그는 무사히 군 제대를 했다.
그가 제대하기 조금 전에 우리 형제들도 케이플레이님이 계신 서울로 모두 이사를 했다.
제대 후 그는 그가 일하던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 후에도 그는 케이플레이님 몰래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진희케이플레이를 만났다.
그는 어머니에게 수동적이었다.
큰케이플레이 나이 서른이 되자 어머니는 노총각인 그의 결혼을 서두르셨다.
둘째 셋째 케이플레이의 혼기도 차고 있어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제주도에 있는 그를 서울로 불러올려 선을 보게 했다.
선을 보고 내려간 케이플레이는 그 여자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내왔다.
그는 물론 선을 보러 서울에 와서도, 선을 보고 나서도 진희 케이플레이를 만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시켜 선 본 여자와 결혼 안 하겠다면 내가 제주도로 쫓아가겠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냈고, 겁쟁이 케이플레이는 결혼하겠다고 빠른 회답을 다시 보내왔다.
결혼 준비가 급속히 진행됐다. 결혼 날짜가 임박해 그가 올라왔다.
그는 진희 케이플레이를 만났다.
결혼 전날, 함을 지고 신부 집에 갖다 주고 밤늦게 집에 온 그가 대문 밖에서 어머니를 부르던 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대문 초인종이 고장 난 상태라 해도 잠겨있는 양철대문을 손가락 구부려 통통 치고 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문 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서른 살이나 먹은 남자가 머리를 대문 위로 추켜올리곤 안을 보며 “엄마! 엄마!” 엄마만을 반복해서 불렀을까. 나는 대문 옆 수돗가에 있다가 깜짝 놀랐다. 그 큰 소리에 불안과 다급함이 잔뜩 배어있었으므로.
나는 대문을 열어주며 그가 다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 같다고 느꼈다.
진희케이플레이 측에서의 침묵으로 결혼식은 무사히 끝이 났다.
결혼식이 끝나고 큰오빠 내외는 저녁에 집으로 왔고 결혼식에 왔던 고향 어른 몇 분도 어머니와 함께 오셨다.
저녁 식사 후 고향 어른들이 새신랑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가 유주용의 ‘케이플레이’를 불렀다.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 부를 때 그 순간만은 그가 정말 서른 살로 보였다.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불렀다. 가사를 깊이 음미하면서.
그가 노래를 마치고 눈물을 보이며 일어나 건넌방으로 건너갔다.
억지 결혼을 시킨 어머니의 업보였을까.
아름다운 새케이플레이와 결혼을 하고 제주도로 내려간 오빠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다가 육 년 만에 홀아비가 되었다. 새케이플레이가 병사한 것이다. 딸이 네 살 때였다.
그는 바로 케이플레이님 집으로 올라와 딸을 케이플레이님에게 맡기고 다시 제주도로 내려갔다. 그리곤 또 연락두절이었다.
죽었다더라, 아니 누군가가 어디서 봤다더라, 그에 관한 소문은 확실한 출처도 없이 사철 바람에 묻어왔다가 사라지곤 했다.
진희케이플레이는 큰오빠와 헤어지고 자신의 아픈 다리를 생각하며 평소 꿈이었던 약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고 입시학원에 가서 공부했으나 사실 따라가기는 어려웠다. 몇 해 그렇게 했으나 대학엔 들어가지 못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원 없이 최선을 다 했음에 만족하고 공부를 접었다.
오빠는 케이플레이님이 안고 가야 할 애물이었다.
십육 년이 지난 어느 봄날, 케이플레이님은 그가 교통사고로 제주도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전화를 받으셨다.
다음날 그는 들것에 실려 서울 케이플레이님 집과 가까운 병원으로 옮겨왔다.
내가 면회를 갔다. 머리에 깁스를 한 그가 자고 있었다. 다가가 그를 살며시 흔들었다.
그가 눈을 떴다. 나를 올려다보더니 느닷없이 통곡했다. 그리고 말했다. 씨이팔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도 나는 엄마가 무섭다고.
진희케이플레이는 미용 기술을 배워 그녀의 여동생과 함께 서울 모 여대 근처에서 미용실을 여러 해 동안 운영했다. 그러던 중에 고향 집에서 지내던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무서워 열일곱 살에 타지로 토꼈던 그는 결국 케이플레이님 집으로 퇴원해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는 왕관처럼 생긴 쇠 깁스로 머리를 고정한 한 채 케이플레이님 집과, 케이플레이님 집에서 가까이에 있는 우리 집을 오가며 지냈다.
거의 우리 집에서 지냈다.
내가 어릴 때도, 커서도 그를 보며 느꼈던 그의 내면은 조금도 성장한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웃음엔 여전히 조소가 깔려 있었다. 한쪽 발은 여전히 흔들면서.
그가 말했다. 국민학교 다닐 때 아침에 누나가 부엌에서 솥뚜껑을 여는데 밥 위에 얹힌 호박잎이 보였다고, 아침 반찬이 호박잎쌈이란 걸 알고 그는 동생들을 데리고 야 우리 그냥 가자! 재촉하며 등교 길을 나섰다고.
빈속으로 등교하는 오빠들에게 키 작은 큰케이플레이가 주걱을 든 채 달려 나와 밥 먹고 가라 울며 매달렸다고 그는 웃으며 얘기했다.
나는 울며 매달리는 큰 케이플레이가 너무도 가엾어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 끝에서 다른 케이플레이들이 과거에 그에 대해 했던 불평이 기억났다. 뙤약볕에서 동생들에게는 고추 따라 시키고 자기는 나무 그늘에 누워 노래 부르다가 사라졌다던 말이.
진희 케이플레이는 대체 그의 어떤 면이 좋아 사랑한 걸까. 하긴 사는 일과 사랑하는 건 다른 영역이긴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말했다. 이병철도 떠날 땐 빈손이더라고, 돈이 뭔 소용 있냐고.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나는 폭발했다.
작은 케이플레이에게 술상을 보게 하고 찌개가 식으면 나에게 다시 데워오라 시키고, 또 시키고,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면 벌떡 일어나 차렷 자세로 서있고, 그러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기어 다니던 그를 불안한 맘으로 바라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땐 크지 않아 방어력 없던 나는 이제 그를 제압할 힘을 세게 가지고 있으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철 좀 들라 말하며 그가 하고 있는 머리 쇠 깁스를 잡고 흔들었다. 그는 아야아야 소리 질렀다.
돈이 있으면 이렇게 혼자 살겠느냐, 케이플레이가 돈이 있다면 싫다고 떠난 엄마한테 도로 들어와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겠느냐, 케이플레이 나이가 지금 몇 살이냐. 호텔 다니면서 번 돈 다 모았으면 빌딩 한 채에 꽉 채웠을 거라며! 그 돈 다 어디다 뿌리고 이렇게 빈 털털이냐고.
나는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나가라고, 엄마한테 가라고 소리쳤다.
그는 쫓겨날까 봐 겁을 내며 소파에 꼭 붙어 앉아있었다.
이런 사람을 좋아한 진희케이플레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말까지 하마터면 쏟아낼 뻔했으나 그 말은 안 하길 잘했다. 거긴 건드려서는 안 되는 그들만의 방이니까.
그는 찍어대는 내가 무섭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손톱을 깎아주었다.
그에게서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가지고 있는 관심을 조금 발견하기는 했다. 실직을 앞두고 있는 두 케이플레이를 진심으로 걱정도 했으니까.
나는 혈육의선한 본능 같은 건 누구에게나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동생들 걱정도 할 줄 아네? 다 컸네!” 조소로 화답하는 나의 눈치를 그가 보며 웃었다.
동태찌개를 끓여 그와 밥상을 마주했다. 그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찌개는 이렇게 오래 끓여야 맛있더라고, 아마 동태랑 양념이 국물에 오래 우러나서 그런가 보다고.
나는 깁스로 머리를 구부리지 못하는 그의 발톱을 깎아주었다.
진희 케이플레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미용실을 접고 고향 집으로 들어갔다.
케이플레이와 사랑할 때 잘 가꾸어져 있던 마당에 잔디도 깔았다.
케이플레이는 결혼 이후 그녀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
봄에 사고를 당해 서울로 왔다가 가을에야 몸을 회복한 그는 다시 제주로 내려갔다.
케이플레이님은 네 살 때 제 아빠와 떨어져 이제 스무 살이 된 그의 딸에게 아빠한테 가서 대학 다니길 권했고, 권유대로 그의 딸이 제주로 내려가 대학에 입학하면서 부녀의 공동생활이 시작됐다.
감감무소식이던 때가 차라리 나았을까.
그곳에선 불안한 잡음이 자주 들려왔다.
이내 그의 죽음소식을 접했다.
그는 직업이 없었고, 육 년의 억지 결혼생활 빼고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공동생활을 해보지 않아서인지 가장이라는 위치에서 그의 딸과 소통이 되지 않았다.
십 대에 어머니가 무서워 서울로 제주로 도망갔듯, 이번엔 딸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 책임이 무서워 자기 방으로 도망가 문을 잠그고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술만 마시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쉰 넷이었고 딸과 합류한 지 이 개월만이었다.
잘 자란 그의 딸과 합심해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바랐던 가족들의 바람은 무리였을까.
그 옛날 신작로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비탈길을 내려가던 뒤태가, 성장해서의 내 체형과도 닮아있던 큰케이플레이.
그가 진희케이플레이와 결혼했다면 끝까지 행복했을까. 결혼식 날 밤에 ‘케이플레이’를 노래하고 흘린 눈물은 그와 어머니와의 상관관계가 있던 것일까.
그가 ‘독한 엄마’라 표현했던 어머니도 실은 그와 똑같은 겁쟁이였다는 걸 눈치챈 순간이 그에겐 없었을까.
이러저러한 궁금증과 의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유보된 채 큰케이플레이, 그는 지금 제주 서귀포에 잠들어있다.
세월은 쉼 없이 흐르고 시간의 회오리도 잠잠해지기 마련이다.
진희케이플레이는 여태 독신이다.
옛날에 그랬듯 그녀는 지금도 화초를 심고 마당을 가꾼다.
봄이면 마당 한 편에서 열린 홍매실로 청을 담그고, 가을이면 가지 호박 등을 썰어 대나무 바구니에 펼쳐 담아 양지바른 툇마루에 놓고 말린다.
그녀는 지금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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