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어서 킹무원이 되었습니다 Vs. 죽기 싫어서 좋무원을 때려칩니다
“사기업 어때요? 좋죠? 여기보다 훨씬...?”
첫 출근 때만 해도 흩날리던 벚꽃이 어느새 다 떨어지고, 시간이 흘러 제법 더워진 어느 날, 박 유투벳가 주 유투벳에게 물었다.
“네? 박 주사님 또 물어보시네~ 하하. 제 대답은 늘 같아요. 공무원이 짱이죠!”
주 유투벳가 호탕한 웃음으로 답했다. 혹시나 다른 이야기를 들을까 기대했던 박 유투벳는 여지없이 똑같은 답을 내놓는 주 유투벳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주 주사는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공무원답지 않은 까만 정장에 더 새까만 구두를 반짝이며 출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기업에서의 습관 때문인지 만나는 민원인마다 악수를 청하며 본인의 공무원 명함을 뿌려댔다. 그때마다 박 주사는 사람들에게 공무원인 걸 알려서 좋을 게 하나 없다고 주 주사에게 알려주었지만, 그는 박 주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사람 사이에 하는 일인데 좋게 좋게 하는 게 좋지 않냐고 답할 뿐. 그런 주 주사의 모습에 언젠가 일이 터져도 터질 거란 확신이 들어 박 주사는 영 불편했다. 그때 그날처럼.
“와! 드디어 분리수거 끝! 하~ 그나저나 날이 벌써 이렇게 더워졌네요. 유투벳님. 하하!”
쓰레기 분리수거 수레 위에 놓여있던 마지막 커다란 하얀 봉지를 분리수거 통에 집어던진 주 주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니 박 주사는 주 주사가 온 첫 주 금요일, 사무실 청소를 하며 당황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자신과 달리, 사기업에서 오래 일한 주 주사는 회사 직원이 직접 사무실을 청소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사기업은 대부분 건물 관리해 주는 업체와 계약을 해서 비용을 지불하면, 알아서 청소도 하고 쓰레기도 비워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박 주사는 역시 사기업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주 주사는 찜찜한 표정이었지만.
“아! 주 유투벳님, 오후에는 저희같이 관내 외부 출장 나가야 하는 거 아시죠?”
그때 생각에 오랜만에 미소 짓던 박 유투벳가 주 유투벳에게 말했다.
“넵! 안 그래도 오전에 차량 배차 해뒀습니다. 이 수레만 사무실 갖다 놓고 바로 가시죠!”
주 유투벳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박 유투벳는 그에게 배차하는 걸 딱 한 번 알려줬을 뿐인데,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척척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 사기업은 다 이렇게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신보다 나이도 열 살이나 많아서, 어린 자신이 업무 지시하는 걸 불편해할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번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었다. 늘 저렇게 사람 좋은 웃음만 지을 뿐. 그 모습에 왜인지 박 유투벳는 기분이 좋아졌다.
박 유투벳와 주 유투벳는 수레를 사무실에 가져다 두고, 바로 출장지로 향했다.
출장지는 관내 공원.
민원이 하나 들어왔다.
공원 부지에 불법 컨테이너가 설치되어 있으니 시민 편의를 위해 당장 치워달라는 민원이었다.
현장에 나가보니 민원 내용대로 공원 옆에 새로 짓고 있는 신축 빌딩 건설사에서 공원 위에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불법 분양 홍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경험상 이런 민원의 처리 과정은 뻔했다. 우선 공무원이 상대방에게 철거 명령을 한다. 당연히 그들은 안 따르고 무시한다. 공무원이 계속 과태료를 부과한다. 치울 때까지. 하지만 보란 듯 그들은 무시한다. 당당히. 그렇게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그냥 그렇게 나오는 과태료를 무시하고 쌓아놨다가, 준공 허가를 받기 전 한 번에 처리해 버린다. 박 주사는 자신의 백따리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은 그 돈이 아깝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몇십억짜리 건물을 짓는 그들에게 이런 한낱 과태료 종이 쪼가리는 바닥에 버려진 껌종이만도 못한 취급을 당한다는 걸 알았다.
똑똑.
이런 과정을 이미 잘 아는 박 유투벳였기에 현장에서 서로 컨테이너를 치우네 마네 얼굴 붉힐 것 없이, 그저 상대방의 명함이나 하나 받아 거기 적혀있는 메일로 과태료나 계속 때리면 되겠지 싶은 생각으로 노크한다. 괜히 긴장되어 손바닥에서 땀이 솟아 나온다. 망할 다한증.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민원 현장에서 누군가를 직접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고 손에 땀이 더 많이 났다. 노크 소리에도 컨테이너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주 유투벳는 문 옆 창문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쾅쾅! 쾅쾅쾅!!!
“계세요!! 계십니까? 시청에서 나왔습니다!”
어디선가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박 유투벳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문고리를 부술 듯 거칠게 돌리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는 주 유투벳의 검정 재킷 끝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박 유투벳가 황급히 그를 따라 들어갔다. 주 유투벳는 민원인을 대하는데 늘 저렇게 거침이 없었다. 사기업 때 만났던 사람들은 다 젠틀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사람 좋은 넉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네겠지.
“하하~ 사장님~ 안에 계셨네~? 시청에서 나왔는데요, 민원이 들어와서요~ 여기에 이런 거 설치하고 막 이렇게 하면 안 되시는….”
안에 들어선 박 유투벳의 귀에 주 유투벳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뭐야, 이 새끼야! 시청? 공무원? 누가 여기 맘대로 들어오래? 요즘 검사들도 이렇게 일 안 해, 이 좋무원 새끼들아!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별 거지 같은 것들이.”
주 유투벳의 말이 끝나기도 전 거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건설사 직원들은 지역 조직 폭력배들이 많으니 조심해.’
누구였더라?
왜인지 그 순간, 박 주사는 공무원이 되고 얼마 안 됐을 때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상한 건 왜, 하필 지금, 이 말이 떠올랐는가였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걱정 말라는 듯, 박 유투벳의 눈앞에 순식간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딱 봐도 조폭처럼 보이는 팔척장신 남성이 주 유투벳의 하얀 셔츠 멱살을 움켜쥐고 공중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주 유투벳는 그의 힘에 옴짝달싹 못 한 채 캑캑대며, 그 남성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박 유투벳는 예전 그때의 악몽 같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비슷했었다.
주 유투벳의 지금 이 업무를 하던 공무원이 있었다.
그녀는 박 주사의 첫 번째 후임이었고, 주 주사와 성별은 달랐지만, 그처럼 민원인들에게 늘 먼저 웃음으로 다가서고, 항상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멋졌던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박 주사처럼 어릴 때부터 손바닥에 다한증이 있어 늘 손수건을 손에 쥐고 있던, 그래서인지 유독 마음이 갔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도, 지금 저 모습처럼 민원인에게 멱살을 잡혀 캑캑대고 있던 적이 있었다.
쾅!
그때 그녀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멱살 잡혔던 그녀를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비참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박 유투벳가 옆에 있던 철제 의자를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리더니 그 조폭을 향해 냅다 던져버렸다. 원래부터 말이 없었을 그 차가운 철제 의자는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조폭의 얼굴로 정확히 날아가 박혔다. 갑작스러운 의자의 출현에 당황한 조폭이 멱살 잡았던 주 유투벳를 바닥에 내동댕이쳐버리고 몸을 틀어 박 유투벳에게 다가갔다.
“넌 또 뭐야? 이 공무원 새끼들이 미쳐 갖고, 선량한 시민을 쳐? 그래 한번 해보자. 오늘 다 뒤졌다! 너네!!”
학창 시절 싸움 한번 안 해 봤던 박 유투벳는 아무런 방어도 못 한 채 조폭에게 얻어터지기 시작했다.
쨍그랑!
그렇게 얼마나 맞았을까? 뭐가 깨져도 단단히 깨진 소리로 인해 갑자기 현장이 조용해졌다.
“꺅!”
그리고 창밖에서 비명소리가 이어진다. 박 유투벳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던 조폭의 움직임이 멈춘다. 그 사이 박 유투벳의 눈에 빨간색 소화기가 창문을 박살 내고 날아가 바닥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게 보였다.
“그만!!!”
평소와 달리 격앙된 목소리의 주 유투벳가 크게 소리치며 박 유투벳와 조폭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어지더니, 저 멀리서 경찰 차인 게 분명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왜 경찰은 항상 일이 터지고야 오는 걸까. 아, 공무원이라 그런가. 이 좋무원들….”
그것이 그날 그곳에서 의식을 잃기 전 박 유투벳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저 불은 밤새 켜놓는 건가? 전기세 나온다고 민원인이 욕할 텐데... 쯧.”
두툼한 하얀 반창고를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박 유투벳가 건물 외벽에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시청 두 글자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낮의 무더운 열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스산한 밤공기만 남은 건물 옥상, 박 유투벳가 난간에 등을 대고 기대어 서있다.
‘그렇게 처맞고 3일 만에 출근했는데 변한 건 하나도 없네. 아니 오히려…. 감사실 감사에, 징계위원회에, 또… 뭐? 갑자기 인사 발령이라고? 참….’
그날 그렇게 의식을 잃고, 박 유투벳는 3일간 출근하지 않았다.
악성 민원으로 이런 일이 생길 경우 3일의 특별 휴가가 주어졌는데, 이번에는 그걸 썼다.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아서. 하지만 쉬는 동안에도 그의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계속 이렇게 얻어터지며 다니는 게 맞는지, 때려치워야 할지, 답 모를 답답한 저울 사이만 계속 오갔다. 그러다 길 잃은 마음이 조폭에게 얻어맞았던 기억에 기어코 닿으면 그냥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여지없이 예전 그날, 자신의 후임이었던 그 공무원의 기억이 저울을 다 부수고, 그를 절망 속으로 질질 끌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엉망인 박 주사의 마음 따위 관심 없다는 듯 세상의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3일이 지나고 출근한 아침, 박 주사의 모니터에는 민원 포스트잇이 정확히 구십팔 개 붙어있었다. 왜 자신과 마주하는 민원은 항상 열여덟 같은 십팔의 숫자로 끝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얼굴만 달라진 민원인은 여지없이 사무실 바닥에 누워 소리나 빽빽 질러댔고, 팀원이라고 앉아 있는 주변 공무원들은 여전히 내 일 아니라며 침묵할 뿐이었다. 아니, 박 주사의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게 달라졌다면 달라진 거랄까.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그렇게 수군거리는데 당사자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다니. 아니, 아는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즐거움을 위해 그렇게 입방아를 쪄대는 건가. 박 주사는 정말 하나도 쓸데없는 그들의 입방아를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문득 앞자리를 살펴보니 주 유투벳의 자리가 비어 있다. 슬쩍 들어보니 오늘 하루 휴가를 냈다고 한다. 자신과 달리 주 유투벳는 그 사건이 있고도 바로 다음 날부터 정상 출근을 했다고. 이것도 사기업 특성인가 싶었다.
‘그렇게 나오면 휴가 쓴 선임인 나는 뭐가 되냐고….’
조금 섭섭했지만, 그래도 주 주사가 자신을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알기에 괜찮았다. 박 주사에게 주 주사는 주변 공무원들과는 많이 다른 공무원이었다. 주 주사 생각이 나니, 자신의 후임이었던 그 공무원이 또 생각난다.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모니터에 붙어있는 민원 포스트잇으로 시선을 옮긴다.
포스트잇 칠십팔 개쯤 떼었을까?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감사실이었다.
그날의 사건에 대해서 오늘 중으로, 문서로 작성해서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특별한 건 아니고, 공무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절차상 필요한 것이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했다. 싫다고 하고 싶었다. 공무원의 권위 그딴 건 모르겠고, 그냥 그깟 종이 쪼가리보다 자신의 면직 신청서를 보내주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자신의 입은 침묵할 뿐이었다. 잘 조련된 말단 공무원답게.
그렇게 다시 묵묵히 남은 포스트잇을 떼기 시작했다. 팝 십팔 개를 띠었을 때 또 전화가 울렸다. 노조라고 한다. 이번 사건은 공무원의 권위에 중차대한 문제임으로 묵과할 수 없다고, 또 문서를 써서 보내달라고 한다. 오늘 중으로. 이번에도 그냥 면직 신청서를 보내주겠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역시 그의 입은 침묵했다.
이쯤 되면 병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시무시하게 고분고분한 공무원 병.
분주한 그의 손이 또다시 포스트잇을 떼기 시작했고 마침내 구십팔 개를 다 뗐다. 환호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바로 그때 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건물 지하에 있는 마음 치료센터였다. 그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방문하라고 했다. 묻지도 않았는데 절대 비밀을 보장해 줄 테니 안심하라고 한다. 새하얀 거짓말. 그 문을 여는 순간, 옆자리 고 대리가 일하기 싫어 정신과 진찰이라도 받은 거냐고 물어올 거다. 공무원 조직은 생각보다 좁다. 새하얀 거짓말이 순식간에 새빨간 화살이 되어 날아와 고슴도치가 될 게 뻔하다. 당연히 이번 전화에도 박 주사의 입은 침묵할 뿐이었다.
몹쓸 전화들 때문인지, 세 번의 침묵 때문인지 포스트잇을 다 뗀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주머니에서 분홍색 손수건을 꺼내 손에 움켜쥔다. 어서 빨리 땀이 흡수되길. 그래야 이 쌓이고 쌓인, 다 찢어 불태워 버리고 싶은 민원을 처리하기 시작할 것 아닌가.
‘아, 그전에….’
갑자기 박 유투벳가 잊은 게 생각났다는 듯 외부 메일함을 연다. 휴가 동안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또 썼던 면직 신청서를 자신의 컴퓨터에 다운로드 한 후, 출력 버튼을 누른다.
'이것만 저 옆에 멍 때리며 앉아 있는 팀장, 과장한테 내면 다 끝 아닌가? 이 구십팔 개 민원도, 오늘까지 문서를 내놓라는 감정 없는 전화들도. 그리고 의미 없는 침묵까지 모조리 다 끝내 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박 주사가 일어나 출력된 면직 신청서를 소리 없이 집어 든다. 주변 눈치를 보니 왠지 모두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신이 지금 뽑은 종이에 대해 물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박 주사가 서랍을 열어 처음 임용식 때 받았던 초록색 플라스틱 막대기로 된 도장을 꺼내 가볍게 인주를 찍어 면직 신청서 아래에 기재된 자신의 이름 세 글자 옆 서명란에 꾹 눌러 찍는다. 이제 당당히 걸어가 저 팀장 앞에 이걸 내 던지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박 주사의 손은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조용히 서랍을 열더니 면직 신청서를 가만히 안에 넣고 문을 닫는다. 역시나 잘 조련된 말단 공무원답게.
하루의 일과는 똑같이 흘렀다. 박 유투벳는 평소처럼 민원 포스트잇의 목을 쳐내고 쳐냈다. 그러다 문득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기에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5시 58분이었다. 분명히 다른데, 그래서 더 평소와 같은 하루가 거의 다 가버렸다. 꽤 많이 쳐냈다고 생각했는데 민원이 아직도 오십팔 개나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면직 신청서를 내자. 그럼, 다 끝이야. 제발. 제발! 이제는 용기를 낼 때야!'
하지만 마음속 절규와는 달리, 그의 손은 평소처럼 눈물 같은 땀만 쏟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 박 유투벳는 좋겠네~ 팀 바뀌어서. 누가 힘이라도 써줬나 봐? 갑자기 인사 발령이라니?”
갑자기 옆자리에서 고 유투벳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종일 잘 피해 다녔는데, 자신을 향해 똑바로 말하니 미처 피하지 못했다. 무슨 소린가 싶어 하는 박 유투벳에게 고 유투벳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킨다. 화면에는 5시 59분에 인사팀에서 올린 인사 발령 공문이 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고, 공문을 열었다.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이 보였다. 그 옆에는 보건소 파견 다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다. 그의 이름 아래, 주 유투벳의 이름도 보였다. 마찬가지로 보건소 파견이라 적혀있다.
맞다. 보건소로 발령이 났다.
그런 소문이 있었다. 전염병이 심해져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을 보건소로 파견한다는 소문. 그리고 그곳에 끌려가면 저 지독한 전염병과 일선에서 맞서 싸워야 하기에 모두가 기피한다는 것도. 그 순간, 박 주사의 머리에 조폭에게 얻어맞았던 그날 자신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며 자신이 손 써보겠다던 팀장의 얼굴이 스쳐 간다. 민원인에게 얻어터진 자신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더 최악인 보건소로 보내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박 주사의 눈에서 불똥 스파크가 팍팍 터져 나온다. 박 주사가 떨리는 손으로 서랍을 연다. 피 칠갑의 인주에 물든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박힌 면직 신청서가 눈에 들어온다. 거칠게 집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박 주사가 팀장을 째려봤다. 그런데 자리가 비어있다. 팀장이 그새 퇴근을 해버렸다. 힘이 풀린 박 주사가 자신의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한 채.
업무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어디선가 주변 공무원들이 튀어나와 방금 들어온 민원이라며 박 주사의 옆에 망할 민원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간다. 퇴근했으면 분명 또 저 새까만 모니터 위에 붙어있었을 것들이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더러운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나선다. 면직 신청서를 여전히 손에 움켜쥔 채로. 딱히 갈 곳이 없어 주변을 둘러보니 환히 빛나는 옥상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옮겨 옥상 문을 연다. 시원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두 번째다. 이곳 옥상에 올라온 건. 옥상은 모든 게 그때와 똑같아 보였다. 달라진 거라곤, 그때는 그 공무원이 함께였지만, 지금은 혼자라는 것. 그러고 보니 그때 그 공무원은 옥상 문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어떻게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한참을 난간에 기대 서 있던 박 유투벳는 옥상 벽에서 등을 떼 몸을 돌려 건물 아래를 내려다본다.
건물 아래로 주차장 그 자리가 보인다.
역시 그 자리는 비어있다.
그게 당연한 거라는 듯이.
고개를 든 박 유투벳가 벽에 매달려 살려달라는 듯 창백한 빛을 보이는 <시청 두 글자를 한참 바라본다.
쓸쓸해 보인다.
자신처럼.
한참을 바라보던 박 유투벳가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면직 신청서를 갈가리 찢고는 옥상 아래로 힘껏 던져버린다. 쓸쓸한 종이 조각들이 휘날린다.
마치 봄날의 벚꽃처럼.
그리고는,
몸을 던진다.
<다음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