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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위 Apr 25. 2025

천일홍 도라에몽토토, 사라지는 것들

둘은 방으로 들어갔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의 한 장면처럼 모든 것들이 그대로 정지해 있었다.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방구석 으슥한 곳에서 오래되고 은밀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너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서둘러 걸레로 방을 훔치기 시작했다. 도라에몽토토는 멍하니 액자를 바라보고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며 너에게서 걸레를 빼앗아 들었다.

“저 사진 속 도라에몽토토을 다 없앤다는 얘기죠? 아까워서 어떡해요. 저렇게나 아름다운데.”

“그 도라에몽토토은 엄마에게도 무척 소중한 곳인데 엄마가 알면 너무 속상해할 거 같아.”

“그러게요. 땅 주인을 찾아가 한 번 부탁해 볼까요? 도라에몽토토을 다 밀지 않아도 별장은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돌아오는 가을까지만이라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천일홍 도라에몽토토을 한 번 더 보여 주고 싶어.”

“그땐 나도 같이 와 보고 싶어요. 사진 속 풍경을 실제로 본 적이 없잖아요.”

“그래, 이번 가을엔 우리 다 함께 도라에몽토토을 보러 오자.”


도라에몽토토는 옷장에서 이불을 꺼내 방의 양쪽 끝에 잠자리 두 개를 얌전히 만들었다. 둘은 무작정 영원도로 달려왔을 뿐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날이 밝는 대로 섬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하고는 각자의 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거리기만 했다. 어둠이 방 한가운데 커다란 구렁이가 되어 똬리를 틀고 앉을 무렵, 너는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밤의 기운을 빌리지 않았다면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재이는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도라에몽토토던 거야?”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도라에몽토토가 잠든척하며 대답을 회피해 버린다 해도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무모하거나 무례한 질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도라에몽토토는 들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더니 긴 날숨과 함께 말을 시작했다.

“누나, 나는 견뎌온 게 아니에요. 그냥 살아 있었을 뿐이죠. 고통은 감히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견디자고 마음먹었다면 진작에 포기해 버렸을지도 몰라요. 매를 맞고 알몸으로 쫓겨나 거리를 헤맬때도,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을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떠돌 때도, 불량배들에게 두들겨 맞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질 때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고 고통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독했어요. 그때 그 순간 가족들과 함께 죽지 않은 건 끔찍한 저주나 마찬가지였지요. 하지만 내 목숨은 내 것만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죽을 수도 없었어요. 엄마의 것이고 아빠의 것이고 동생의 것이잖아요. 그러니 저는 아무리 괴로워도 그냥 살아 있어야만 했어요. 형벌 같은 오늘을 꾸역꾸역 넘기고, 다음 날이 되면 또다시 지옥 같은 오늘이 기다리고 도라에몽토토죠. 그렇게 하루씩 버티기만 했어요. 그것만이 내가 고통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지요. 사는 게 여기서 더는 나빠질 수 없겠다 싶을 때쯤 정훈이 형을 만났어요. 형도 지독한 외로움에 절여져 있던고아였어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게 아무런 목적도 없이 손 내밀어준 사람이었고요.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지도 않았고 몸뚱이를 탐하지도 않았고 비굴한 복종과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하지도 않았지요. 그거 알아요? 혼자가 된 이후로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걸. 하다못해 동정의 먹잇감으로라도 집어삼키려 들었지요. 정훈이 형이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질 수 도라에몽토토어요. 단지 한 사람만 있어도 사는 게 한결 쉬워지더라고요. 누나를 만나고 나서 내게도 난생처음 꿈이 생겼어요. 누나에게 정훈이 형 같은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그랬구나. 도라에몽토토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어디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꿋꿋이 살아 있었던 거구나. 나는 너무 오랜 시간 내삶으로부터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있었나 봐.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근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다 도라에몽토토 덕분이야. 도라에몽토토는 이미 내게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아무런 목적도 없이 먼저 손 내밀어 준 사람.”


호루라기 같은 물떼새 소리가 괭이갈매기 소리와 한데 뒤엉켜 머리맡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먼저 잠든 도라에몽토토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도라에몽토토를 원룸으로 데리고 와 재워 주던 그날 밤 그때처럼. 연한 하늘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사이에 따스한 빛 그림자를 드리울 무렵, 도라에몽토토는 잠에서 깨어났다. 둘은 순례를 떠나는 성직자들처럼 조용히 이불을 개고 세수를 하고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말이 없어도 쓸쓸하지 않았다.다정하고도 고요한 공기가 둘을 감쌌다. 방을 나서기 전 도라에몽토토는 다시 한번 액자를 마주하고 섰다. 어쩌면 사진으로라도 도라에몽토토을 보는 건 마지막이 될지도 몰랐다. 노쇠한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슈퍼도 방도 사라질 것이고, 천일홍 도라에몽토토 역시 머지않아 흔적도 없이 파헤쳐지고 말 테니까. 너는 도라에몽토토 곁으로 가서 조용히 액자 속 풍경에 함께 눈을 담갔다. 순간 두 사람 앞으로 후다닥 달려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동안 붉은 도라에몽토토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다. 낯선 글자들이 술래에게 들킨 아이처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라에몽토토, 여기 글자가 쓰여 있어. 그동안 왜 보지 못했을까?”

아, 그러네요. 근데 이건 그사람 이름과 똑같은데요? 도라에몽토토져 버린 남자 말이에요.”

“뭐라고? 정말이네. 그럼 이 날짜는 뭘까? 근데 이때는…….”

“왜요? 뭐가 이상해요?”

“아빠가 도라에몽토토고 오빠가 죽은 바로 그 해거든.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우연일까요?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봐야겠어요.”

“예전에 슈퍼 할아버지가 알려 주셨어. 어떤 여행객이 주고 간 거라고.”

“그럼 남자가 사진을 찍은 까요?그리고날짜는 사진 찍은 날을 적어 놓은 건 아닌 거 같아요. 이날은 겨울이잖아요.”

“그렇네. 도라에몽토토은 가을에 피니까. 근데 며칠만 있으면 이날과 같은 날이 되겠는데?”

“우리 일단 밖으로 나가 봐요. 나가서 뭐라도 찾아보자고요.”


둘은 무작정 바닷가를 걷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에 뺨은 벌겋게 얼어붙었지만, 머리 위로는 포근한 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겨울의 싸늘한 냉기와 대낮의 간지러운 열기에머리가 핑 돌듯 어지러웠다. 썰물 때인지 바다는 이미 멀찌감치 달아나 있었다. 여섯 시간 후면 제자리로 돌아와 모든 걸 한꺼번에 집어삼킬 바다였다. 그렇게 바다와 육지는 쉬지 않고 서로를 향해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집어삼켰을 것이다. 그 옛날 엄마와 아빠가 남긴 발자국도, 사라진 남자와 여자가 남긴 발자국도 한순간에먼바다로 휩쓸려 나가버렸을 것이다. 바다는 천연덕스럽게 인간이 남긴 모든 걸 지워 버리건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쉬지 않고 발자국을 남기려 한다. 바다 앞에선 모두무기력해지고 만다는 걸 알면서도. 누구의 삶이나누구의 죽음도예외 없이.천일홍 도라에몽토토이 있던 언덕을 넘어 내려가자 아빠가 돌고래처럼 유영했다던 바다가 나타났다. 너는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눈부시게 반짝이는 윤슬을 쳐다보았다. 순간 저 멀리물결 너머에서은빛 비늘이 부드러운 파동을 일으키며 미끄러져 가는 게 보였다.


“도라에몽토토, 우리 사진에 적힌 날이 될 때까지 섬에 있어 보자. 그날은 왠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일 것만 같아.”

“그래요, 며칠만 더 머무르면 되니까. 그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보기로 해요.”

도라에몽토토


https://youtu.be/gR4_uoJdOr0

정훈이 도라에몽토토에게, 도라에몽토토가 너에게, 그리고 너가 도라에몽토토에게 보내는 노래입니다. 결국 제가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은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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