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웃는 얼굴로 이별을 말하고 너는 굳은 표정으로 슬롯존을 말해서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 사이에는 단단하고 두꺼운 벽이 있어서 하루 종일 포개어져 있는 날에도 불안의 감각은 무섭게 열려 있곤 했다. 우리는 표정을 먼저 본 후에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가만히 기다리면 까만 배경에 흰 글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 차로 뒤늦게 보이는 활자들은 예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너의 입모양은 분명 “I want to marry you”였지만 커다란 스크린에 부유하는 글자들은 “I won’t marry you until I become a big business man.” 이었다. 나는 그 글자를 보고 주저앉아 울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서 약점까지도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와 나는 서로의 약점마저도 슬롯존할 만큼 강했다는 걸. 가장 못나고 어설픈 모습까지도 귀여워했다는 걸. 그러나 영화는 막을 내리고 모두 퇴장했다. 나는 방금 본 영화에서 눈물을 흘린 몇 개의 프레임은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건 아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다시 만날 날을 믿고 있다. 빌려 입은 그날의 티셔츠가 아직은 옷장 속 서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모아둔 슬롯존 티켓처럼 장난치듯 건넨 구겨진 쪽지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가장 먼저, 이제는 너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버스트 키튼 주연 슬롯존 <Cops의 대사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