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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Feb 14. 2025

무성슬롯존


나는 웃는 얼굴로 이별을 말하고 너는 굳은 표정으로 슬롯존을 말해서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 사이에는 단단하고 두꺼운 벽이 있어서 하루 종일 포개어져 있는 날에도 불안의 감각은 무섭게 열려 있곤 했다. 우리는 표정을 먼저 본 후에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가만히 기다리면 까만 배경에 흰 글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 차로 뒤늦게 보이는 활자들은 예상과는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너의 입모양은 분명 “I want to marry you”였지만 커다란 스크린에 부유하는 글자들은 “I won’t marry you until I become a big business man.” 이었다. 나는 그 글자를 보고 주저앉아 울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어서 약점까지도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너와 나는 서로의 약점마저도 슬롯존할 만큼 강했다는 걸. 가장 못나고 어설픈 모습까지도 귀여워했다는 걸. 그러나 영화는 막을 내리고 모두 퇴장했다. 나는 방금 본 영화에서 눈물을 흘린 몇 개의 프레임은 기억에서 영원히 지우기로 마음먹었지만 그건 아마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다시 만날 날을 믿고 있다. 빌려 입은 그날의 티셔츠가 아직은 옷장 속 서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차곡차곡 모아둔 슬롯존 티켓처럼 장난치듯 건넨 구겨진 쪽지처럼 아무리 애를 써도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가장 먼저, 이제는 너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버스트 키튼 주연 슬롯존 <Cops의 대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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