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설계도 같지만 목적을 알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트벳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참혹한 수용소를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듯 높게 올린 담벼락과 넘어오는 비명을 무시하는 일상적 장면보다도, 극의 초반부 아우슈비츠 소장인 회스가 수용자들을 처리할 시설을 엔지니어들과 논의하는 신에 있다.
얼핏 보아서는 군납 요청에 따라 군수품을 조달하려는 군인과 사업체의 평범한 대화 같지만 그 '목적'이 '인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살해제트벳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것임을 알고 나면 그 대화가 더 이상 평범하게 들리지 않는다.
악에 받친 소리로 '잡종을 잡아 죽이자'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광분은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는 지점에서 역사를 돌아보는 우리를 서늘하게 만드는데,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질문도 덩그러니 남긴다. 어쨌든 1100만에 달하는 사람이 짧은 시간에 처형되지 않았나. 그 행위의 윤리적 논의를 떠나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면, 누군가는 사람을 살해해야 제트벳 넘쳐나는 시신을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이념과 망상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것이 '실무적' 영역으로 넘어오게 된다면, 과연 그곳에 있는 인간은 어떤 선택을 제트벳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보았던 '악의 평범성'일까.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사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을 들여다본다.
이 제트벳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다. 유대인을 하찮은 짐승으로 여기면서도 그들이 걸치고 있던 옷가지나 재물은 저항 없이 받아들이며, 수용소 소장 회스는 극 중반부에 수용자와 성관계를 하고서 나중에 성기를 닦는 행위를 보여준다.
금전적 욕망이든, 저속한 욕구든지 간에 그 자신에 필요한 것은 더럽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그 원주인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정말로 어떤 대상이 싫으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관계 맺음 자체도 꺼리지 않는가. 그러나 이들은 필요한 것을 취제트벳 불필요한 것을 버릴 뿐이다. 다시 말해 빼앗아서라도 안락제트벳자 하는 마음이 악행과 이념에 앞서있으며, 나치즘이 벌이는 일련의 광기들은 안락함을 위해 소모될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바로 이 모순성제트벳 영화가 말하려는 지점이 대두된다.
이들은 무자비한 야차의 탈을 쓰고 있지 않다. 살육을 즐기지도 않으며, 괴로운 것은 보려고 하지 않는 평범한 인간들이다. 하지만 편안한 삶을 위해서 던져진 무엇인가를 해내야 한다면 방법을 궁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드러난 높은 담벼락, 소리 외에는 볼 수도 없는 유대인들의 참살 현장, 신속제트벳 효율적인 죽음을 산업적으로 구상해야 하는 회스의 '소각장' 논의로 표현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악제트벳 끔찍한 현장을 그들 스스로도(양심에 의거한 게 아니라 그저 끔찍하기에) 원하지 않기 때문에 도리어 그 행위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을 잘 고안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피가 튄다 하더라도 불쾌제트벳 끔찍한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는 선언과도 같은 이 모순성이, 홀로코스트와 아우슈비츠라는 특별한 시기와 장소에만 국한된 것 같지 않은 기분은 그저 착각으로만 느껴지진 않는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그런 생각은 꽤 흔했던 것은 아닐까.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이 제트벳는 사물이 인물을 가리거나 앞서지 않는다는 기본적인 규칙을 자주 어긴다. 오히려 사물과 일상 속에 파묻어버린다. 또한 인물이 스크린 내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은 한정적 프레임을 자주 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주된 특징이라고 한다면 죽음과 격리된 높은 담벼락의 이미지, 그리고 소리로만 전해지는 죽음의 메아리가 있겠지만 그 못지않게 독특한 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제트벳의 창문인 프레임(카메라가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이자 영상이 담긴 화면의 틀)이 매우 단단하고 경직돼 있다는 점이다.
이 제트벳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은 대단히 직선적이고 고정적이다. 대부분의 숏이 카메라가 고정된 채 한 장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180도로 인물의 정반대를 비추는 리버스 숏을 자주 사용한다. 그 말인즉, 카메라의 시선은 고정적이지만 위치는 자유롭다는 말도 된다. 또한 카메라는 인물에게 매우 불친절하며, 어떤 숏은 바람에 나부끼는 이불이 화면의 1/3을 차지하고 등장인물이 불편하게 그 사이를 지나가게끔 하는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식의 카메라 프레임의 의도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제트벳 갇혀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한편으론 자신의 입장에 따라 얼굴색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형태를 조형한다.
위에서 언급한 '불쾌한 것은 피하려고 하는'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자. 인류는 농경시대부터 타지를 점령제트벳 포로를 노예로 부렸으며, 노예를 계층화하여 힘든 노역과 잡역에 마음껏 투입했다. 그리고 인구가 많아진 다음에는 아예 계급이라는 게 생겨 천민과 귀족이 나뉘게 되었다. 천민들은 주로 귀족들의 삶에 꼭 필요하지만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으며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으론 '백정'이 있다. 양반들이 고기는 매일 즐기면서 그 고기를 만드는 백정은 천민으로 하대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꼭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모순성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런데 여기서 사람들은 정해진 테두리를 잘 벗어나지 못했다. 신분 사회는 수천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한 개인이 자유를 얻은 것은 민주공화정이 시작된 근대의 일이지만, 현대에 이르기까지 암암리에 차별과 신분적 특성은 그대로 존속한다. 일련의 사회 시스템은 특정 집단의 풍요를 위해 다른 집단의 희생을 강요제트벳 구조로 짜여 있다. 그걸 직시하지 않기 위한 방법이 높은 담벼락으로 드러나기도 제트벳 것이며, 때로는 이념과 문화로, 물리적, 정신적 방법까지 총동원되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존 오브 인터레제트벳는 이 지점에서 두 가지 형태의 사람이 있음을 시사한다. 아우슈비츠 옆의 좋은 정원에서 살고 있는 가족 구성원은 회스를 비롯한 어른들도 있지만 이제 막 자라고 있는 어린아이들도 있다.
어른들은 대체로 불편한 진실이 담벼락과 프레임 너머에 있다는 걸 안다. 시스템을 설계하는 회스는 당연히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며, 그의 아내도 담벼락 너머에 유대인 수용자들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날마다 소각장에서 산 채로 불태워진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다. 다만, 들여다보지 않을 뿐이다. 반면 아이들은 차단된 벽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제트벳 눈에 보이는 프레임 안쪽의 세계만을 인식한다.
어떤 사회나 시스템에 소속된 사람들도 이들과 비슷한 상태를 가진다. 누군가는 불쾌한 진실이 있음을 알지만 그것이 가져오는 편리로 귀를 막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고, 또 누군가는 순수한 아이들처럼 어떤 벽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 뿐,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어째서 생기는 것인지는 알지 못할 수 있다. 어떤 쪽이든 사람들은 불쾌하고 끔찍한 것은 보지 않는다. 그저 그 결과물로 나온 것들에만 관심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리가 담벼락을 넘게 된다면, 프레임을 벗어난다면 이 안락함과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존 오브 인터레제트벳는 그 가능성마저도 회의적으로 축소한다. 인상적인 열화상 카메라 신을 제외하면 비좁은 프레임에 인물들을 가둬놓던 카메라가 갑자기 해방되는 시점은 회스가 수용소장 회의에 참여했을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전의 숏들과 달리 인물들은 탁 트인 공간에서 자유롭게 왕래하는 편이다. 그런데 파티에 참여한 회스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드넓은 공간을 바라보면서도 '만약 여기를 가스실로 만들면 어떨까' 같은 병적인 일중독 증세를 보인다.
카메라가 인물을 놓아줘도, 수용소제트벳부터 멀리 떼어놓아도 습관처럼 젖어버린 생각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게 묵묵히 삼킬 수 있고 소화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잖는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보이는 복도 계단제트벳, 좁은 카메라 프레임에 다시 갇힌 회스는 뱉어낼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무엇인가를 게워내기 위해 헛구역질을 한다(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토사물이 쏟아지지 않는다).
어떤 세상에 있어도 결국 돌아오게 되는(특히 이 신은 두 번 반복된다) 이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자각한 인간은 환멸과 공포, 그로 인한 제트벳레스와 노이로제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순환을 벗어날 방법은 없겠는가'라고 하듯, 간절하게 심연의 끝을 응시제트벳 회스의 시선을 따라 화면은 갑자기 현대의 아우슈비츠 추모 박물관으로 전환된다.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 <존 오브 인터레제트벳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라면 바로 거대한 유리창이다.
박물관을 청소제트벳 사람들 앞에는 유대인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의 신발 수천 켤레와 수용복이 유리창 안에 보관되어 있다. 냄새도 질감도 차단된 투명한 벽. 유리창은 인간이 발명한 가장 독창적인 발명품이기도 하다. 바깥을 보고자 하면서 외부와는 격리제트벳, 대상의 실재함을 마주하지 않으면서도 대상을 들여다보려고 제트벳 관음적인 장치다.
제트벳의 마지막에 유리창과 그 속에 갇힌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현대의 시선에서 보여주는 까닭은, 우리도 이 제트벳 자체를 스크린이라는 투영장치를 통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잔혹한 역사라도 이중, 삼중의 '거리두기' 장치를 통해서 들여다보고 있는 우리 자신은 혹시 끔찍하고 불편한 것을 곁에 두지 않으려는 결연한 의지 속에 갇혀있지 않은가. 막연히 편안한 일상에 있으면서 그것이 피로 얼룩져 있을 리는 없다는 믿음(혹은 알더라도 치워두겠다는 마음)을 강제한 채로.
결국 마지막까지 딱딱하기 짝이 없는 프레임 속에 다시 관객을 가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마치 이렇게 이야기하는 듯도 하다. 너희가 과연 이 틀을 깰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 모든 관심 영역에서 불편하게 자리 잡고 있는 어두운 진실을 보지 않으려고 애써 노력제트벳 있지는 않은가,라고.
*본문 사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제트벳(2024) 스틸 컷 중
-영화 <존 오브 인터레제트벳(2024)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