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다방으로 들어오는 그의 가슴에 상을 당한 표시의 작은 리본이 달려 있었다.
그것은 그의 슬픔일 뿐 나는 나의 궁금증이 더 컸다.
나는 물었다. 우린 왜 좋아하면 안 되는지를.
그는 우리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충격으로 어머니가 매일울고 장남인 지가 여러 가지로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언니 친구인 정인언니의 동생이기도 한 그를 나는 짝사랑했었다.
같은 반이기도 했던 그 아이가 6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갔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그 아이에게 밥 해 주기 위해 올라와 있던 정인 언니가 작은 언니를 자주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그 아이도 우리 집에 같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중학교 3학년 가을이었다.
어느 날 밖에서 들어오는데 얇은 잠바를 입은 한 아이가 우리 집을 오르는 낮은 언덕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스쳐 지나서 집으로 들어왔다. 한참 후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아까 그 아이가 서있었다.
그가 서울로 전학 오고 사 년 만이었다. 얼굴이 변해있어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놀라 그날 그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에 없다.
저녁에 그가 그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던 뒷모습만 기억할 뿐이다.
나는 주말마다 그를 기다렸다.
정인 언니 혼자 올 땐 실망했다. 그와 같이 올 땐 난 긴장해서 몸과 맘이 자꾸 굳었다.
그와 성당 저녁미사에 같이 갔다.
나는 돈이 없어 헌금을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넉넉한 집안의 아들인 그는 헌금 정도야 어렵지 않게 하지만 돈 없어 못 내고 앉아 있는 나는 창피했다.
미사가 끝나 밖으로 나와 깜깜한 길을 둘이 걸었다. 우리 집에까지 가깝지 않은 길을 걸으며 서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산 아래와 동네 사이로 난 비포장 도로에 그와 내가 걷는 소리만 났다.
내가 늘 그랬다. 안에서 주체 안될 만큼 감정이 소용돌이쳐도 나는 표현할 줄 몰랐다. 한 마디도.
그도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되었다.
그가 이젠 혼자 다녔다.
시골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용돈 많이 받아왔다며 영화구경을 가자고 했다. 교복을 입고 단성사에 가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을 보았다.
정인언니 혼자 우리집 출입이 잦아졌다. 우리 집에서 거의 한 달 이상 머물기도 했다.
한 방에서 식구가 다 자던 시절이었다.
밤에 자고 있는 내 머리 위로 양쪽에 누운 오빠와 정인언니가 손을 잡기도 하고 손장난을 하기도 했다.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제 같이 나갔나 아니면 밖에서 만났나 오빠와 키 크고 통통한 정인언니가 밖에서 같이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정인 언니가 우리 집에 너무 오래 머문다며 그의 큰 누나가 정인언니를 데리러 왔다. 시골 어머니가 걱정하며 얼른 데려오라고 했단다.
오빠가 집 앞으로 택시를 불러서 태워 보내며 택시비를 긴 머리로 날씬하고 미소가 예쁜 큰 누나에게 주었고 큰 누나는 놀라 안 받으려고 하다가 웃으며 받았다. 두 언니는 택시를 타고 떠났다.
작은 언니와 함께 나도 그의 집을 방문했다. 그가 기타를 막 배우고 있던 때였다.
노란색 그의 작은 녹음기에 그가 기타 치며 녹음해 놓은 양희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몇 번 틀어서 들었다. 저음인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의 큰 누나와 함께 밤에 택시로 떠났던 정인 언니는 또 우리 집엘 자주 왔다.
뚝섬 가게에서 따로 지내는 어머니가 형제들끼리만 살고 있는 중곡동 집으로 와서 이불 빨래를 하셨다.
이불 홑청을 씌워 꿰매는 어머니 맞은편에 앉아 정인 언니도 같이 이불을 꿰맸다.
오빠가 밖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방을 들여다보며 정인언니에게 바느질 잘한다고 말했다.
겨울에 그가 왔을 때 그의 손에 발자크 작 '골짜기의 백합'이 들려있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찾아읽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와 연상 여인의 사랑이야기였다. 공감이 되질 않아 바로 덮었다. 얘는 이 책을 다 읽었을까 아마 다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우리 집에 자주 왔다. 작은 언니가 비빔국수를 해주기도 했다.
동네에 있는 탁구장에서 그와 탁구를 치며 내가 탁구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 처음 쳐보는 탁구를 내가 잘 치고 있어서 신기했으니까.
정인언니의 어머니에게 가서 큰 절을 하고 올라온 오빠는 어머니에게 정인 언니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당신의 허락 없이 오빠가 정인언니를 사랑한 배신감에서였는지 정인이는 게을러서 안 된다고 말했다.
연애쟁이 오빠는 고등학교 땐 웃말 연상의 성자언니와 결혼하면 안 되냐고 어머니에게 묻기도 했었다.
정인 언니가 오빠에게 왜 자기를 어머니에게 정식 인사를 안 시키는지 따지며 다툼이 일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땐 그의 편지만 한 번 받은 것 깉다.
나도 그도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
어느 날 혼자 그의 집엘 갔다. 그가 없었다. 그의 책상 위에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이 있었다. 내가 보는 문예지를 얘도 보고 있구나 생각했다.
무심히 집어 펼친곳에 소설가 강석경이 쓴 그녀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녀가 시대를 앓다가 학교에 자퇴서를 낸 내용이었다. 긴 생머리로 서있는 강석경의 흑백 옆모습 사진이 멋있었다. 그녀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나는 그의큰누나에게 얘기하고 그 책을 빌려왔다. 도로 갖다 주지 않았다.
그가 군에 입대했다.
정인 언니가 새 사랑을 만나 결혼했고 다음 해에 오빠도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군에 있는 그와 편지가 오갔다.
윤정하의 '찬비'를 들으면 내 생각이 난다고 했다. 나는 윤정하의 목소리가 맑긴 한데 찬비처럼 춥게 들려 윤정하를 좋아하진 않고 있었다.
나는 답장에 '찬비' 얘긴 쓰지 않고 '아들린느를 위한 발라드' 피아노 곡이 요즘 유행한다고 썼다.
그 곡은 모르고 있다고 그에게서 온 답장에 쓰여 있었다.
그가 휴가를 나올 때 내가 직장을 다니다가 백수였다가를 반복하던 때였다. 직장을 다니고 있을 땐 그에게 맥주를 사줄 수 있었다. 맥주 집에서 되지도 않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내가 많이 한 것 같다. 그땐 그렇게 말해야 내가 멋있게 보이는 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귀대해서 쓴 편지에 겨울끝 봄의 시작쯤에서 땅이 녹은 모습을 '땅이 징징 운다'고 썼던 문장이 기억난다. 첫 봄볕 아래서 언 땅이 녹아 질척거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나는 그 표현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지막 휴가를 나왔다.
나는 그에게 제대하면 뭐 할 거냐고 물었다. 무슨 일이든 할 거라고그가 말했다.
그가 다음 날 오전에 고향 부모님에게 내려가야 하는데 강남 고속 터미널에 같이 가자고 했다.
다음날 만나기로 약속한 을지로의 한 다방에서 기다렸다. 그가 오지 않았다.
다방을 나오니 비가 후둑후둑 떨어졌다. 양손을 깍지 껴 머리 위를 가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슷한 다방 이름의 간판이 맞은편에 있었다. 올려 깍지 낀 양손을 풀지 않은 채 길을 건너 그리로 뛰었다. 동그란 빗방울이 보라색 원피스에 닿으며 굴러 떨어졌다. 드문드문 원피스가 젖었다.
저쪽에서 문쪽을 바라보는 위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그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의 탁자 위 재떨이에 그가 피운 담배꽁초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그와 함께 밖으로 나오니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가 우산을 사서 펼쳤다. 우산을 들고 있는 키 큰 그의 팔꿈치를 키 작은 내 손이감아 잡았다.
터미널에 도착했다.
대합실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고향에 가면 오토바이를 탈 거라고.
그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을 까봐 겁이 났다. 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시집가고 싶었으니까.
다음 주 28일에 다시 올라와서 연락하겠다고 그때 다시 보자말하고그가 버스에 올랐다.
28일이 지나도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
귀대 날짜도 이미 지나있었다.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당연히 약속했던 연락을 왜 주지 않았는지가 궁금했지만, 그걸 물어야 했지만 묻지 않았다.
보고 싶다고 썼다. 그도 그렇다는 그의 답장을 받았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지에 대한 그의 해명은 없었다.
그의 제대 날짜가 한참 지나있었다.
그의 마음을 알아야 했다.
그 가을날 나는 고향에 내려가 그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그의 한 마디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전화를 끊는 쇳소리를 급히 들었다.
그가 다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화가 들어있었다.
그 무렵 인기 있던 티브이 드라마에서 유지인이 정한용에게 한 질문을 내가 하고 있었다. 우리는 왜 좋아하면 안 되느냐고.
그는 우리 친구로 지내자고 했다.
내 문제도 그렇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어머니가 매일 울어 장남인 지가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안쪽에 앉아있던 그가 일어나더니 나의 무릎을 밀고 나갔다.
그가 그렇게 빨리 매몰차게 나가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남아돌아 담배 피우며 유지인에게서그 말을 듣고 싶어 앉아있었을 정한용에게 드디어 했던 유지인의 대사를 내가 외울 수도 있었다. '나 오늘 밤 집에 안 들어갈 거야!'
커피값을 내고 나가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뒤를 따라 나도 그 지하다방의 계단을 올라 나왔다.
그가 다음 주에 서울 올라갈 건데 그때 전화할게.말하고 그는 자전거를 타고 그의 집 방향으로 떠났다.
나는 그가 전화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몹시 화가 나있는 그의 얼굴이 말해주고 있었으므로.
몇 년 후 나도 그도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다.
축의금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그가 보낸 건아니었다. 그의 어머니가 결혼식장에 와서 작은언니에게 뱅크카지노던 말을 나중에 들었다. 우리 정인이 찾아내라고.
먼저 결혼한 정인 언니가 그녀보다 일 년 후에 결혼해서 잘 살고 있는 오빠에게 만남을 다시 이어가기 원했고 오빠가 거절하자 정인 언니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결혼식장에서 오빠를 잡아 따지지 않고 작은 언니에게만 말 한 건 다행이었다.
단칸방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달콤했다.
나는 처음부터 남편에게 꽉 잡혔다.
어느 날 나의 한 형제에게서 심한 말로 상처를 받은 내가 화가 나서 그 형제의 흉을 쏟아내고 있었다. 출근하려고 옷을 입던 그가 돌아서더니 말했다. "지금 니가 욕하는 당사자가 니 형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 앞에서 내 형제들의 흉을 보지 않는다.
첫 아이가 15개월이 되었다.
둘째 아가가 뱃속에서 해찰을 부렸고 나는 토악질을 했다.
시내에선 데모가 한창이었다. 집값이 바닥을 치고 있어서 작은 아파트를 계약할 수 있었다.
이삿짐을 싸고 있는데 옆 방 새댁이 부엌 쪽문으로 몸을 들이밀고 들여다보며 말했다.
"88 올림픽이끝나면 이런 방 한 칸이 천만 원 시대가 된대요."
나는 놀라며 되물었다. "천만 원이나요?"
6,10 항쟁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가족은 명일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했다고 어머니가 보낸 시누이가 고춧가루와 생 야채등을 가지고 올라오는 터미널로 마중을 나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최루탄 냄새로 아이와 함께 기침을 했고 눈물을 흘렸다. 버스 창문을 닫았다.
6,29 선언이 있었다
작은 아이를 낳았다.
가을에 88 올림픽으로 나라가 축제 분위기로 들썩일 때 큰아이는 '손에 손 잡고' 노래를 야무지게 부르며 뛰어다녔다.
집안일을 하다가 라디오 음악 프로에서 나오는 그와 고등학교 때 함께 보았던 영화의 OST 'SUN RISE SUN SET'을 들을 때면 그를 생각했다.
그를 꿈에서 보기도 했다.
싱가포르에 있는 동생에게 '어젯밤 꿈에서 현욱이를 봤어. 걔도 꿈에서 나를 볼까? 이 씨, 나만 보는 거 아니야?' 편지를 썼다.
두 아들이 초등학교, 유치원에 입학했다.
시골에서 고추장을 담가주러 올라오신 시어머니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심근경색으로 입원을 하셨다.
결혼 후 첫제사 때 내려가 시렁 위 곶감을 제사상에 올릴 건 줄도 모르고 몰래 집어 먹었던 나를 위해 해마다 어머니는 곶감을 만드셨다. 그해 유난히 많이 말려오신 곶감 보자기를 풀어서 급히 베어 먹으며 나는 어머니가 계신 병원과 집을 오갔다.
하도 예뻐서 너무 끄리고 키운 탓에 두 아들은 나를 떨어지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가는 나에게서 떨어지기 싫어 아이들은 징징거렸다.
어머니의 입원으로 만들지 못한 고추장 재료는 거실 한 구석에 그대로 있었다.
보름 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시동생과 교대하려고 병원에서 점심을 같이 먹던 차였다. 어머니가 물을 넘기다가 휭! 휘파람 소리를 한 번 내곤 뒤로 넘어갔다. 그게 끝이었다.
그 병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백일도 되지 않은 아기를 데리고 시누이가 다시 올라와 내가 할 줄 모르는 고추장을 담가줬다.
좁은 거실 겸 방에서 둘이 고춧가루와 메줏가루에 소금을 넣어 큰 주걱으로 비비다가 날리는 고춧가루에 교대로 재채기를 했다. 팔 아파 힘들면 누워 잤다. 그리고 부스스 일어나 같이 졸린 목소리로 얘기하며 또 비볐다.
삶은 투쟁이다.
남편은 365일 일을 했다.
남편이 몸이 너무 힘들어 잠 잘 기운도 없다고 했다. 몸이 힘들면 잠이 잘 오는 줄 알고 있던 나는 과로가 지나쳐도 잠을 못 잔다는 걸 그때알았다.
그가 밖에서 달릴 때 나는 아이들과 안에서 달렸다. 그가 몸뚱이로 벌어 가져다주는 돈을 꼭 필요한 지출 외엔 쓰지 않고 지갑을 닫았다.
그가 가엾어서, 그에게 미안해서.
방 하나가 더 있는 옆 단지로 이사를 했다.
이사할 때 동생에게 빌린 적은 돈을 남편은 부담스러워했다.
남편은 퇴근 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 년 만에 동생의 돈을 다 갚았다.
남편이 화장실에서 쓰러졌다.
빚 갚고 과로와 긴장에서 놓여나며 일어난 사고였다. 그는 일어나서 장경련으로 화장실을 여러 번 다녔다.
바로 회복될 리 없는 탈진으로 그가 집에서 영양 주사를 맞았고 그렇게 누워있는 그를 보며 학교에서 귀가한 아이들이 아빠 불쌍해! 하며울먹였다.
다음 날 그는 샤워를 했고 젖은 머리를 탈탈 털며 출근했다.
전국에서 국민학교 동창회가 한창이었다. 한 반이던 친구가 전화로 동창회가 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 아이도 나올는지 궁금해 전날 밤잠을 설쳤다.
친구 차에 동승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동창회실에 들어서니 을지로 다방에서 출입구를 바라보는 자리에서 앉아있던 그 처럼, 출입구 쪽을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있는 그가 보였다. 그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몸을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그도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 나는 그간 잘 지냈느냐고 물었고 그는 잘 지냈다고 대답했다. 그에게 차인지 십오 년 만이었다.
나는 그와 대각선 끝자리에 앉았다.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돌아가며 친구들이 노래를 불렸다. 처음에 돌리는 노래 신청지에 나도 부를 노래를 적었으나 지명되지 않아 부르지 않았다. 사회 보는 친구가 모르고 넘어간 듯했다. 다행이었다. 숨이 막혀 노래를 못부를 수도 있었다.
옆자리 친구가 자리를 비우자 그가 얼른 와서 앉았다.
안부 정도의 이러저러한 말이 오간 끝에서 그가 말했다.
"내가 꼭 할 말이 있어."
며칠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터미널 대합실에서 28일에 전화할게, 지하다방에서 나와 다음 주에 올라가 전화할게, 하고는종무소식이던 놈이 십오 년 만에 한 약속은 지켰다.
며칠 후 그의 전화를 받고 심한 감기 몸살 중에 있었으나 나가서 그를 만났다.
모든 행동은 발자국을 남긴다. 그것이 빗나간 욕정의 흔적이라면그것은가버린 시간의 길이와는 상관없이 벌떡 일어나 날을 세우고 달려들 기세로 서 있다.
그가 얘기했다.
그날 터미널에서 고향 집으로 내려가 그의 어머니에게 내얘기를 했다고,
그의 어머니가 말하더라고, 나의 오빠가 정인누나뿐 아니라 큰 누나와도..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자기는 순수했는데 00형은 그러지 않았다고.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급히 생각했다.
몸살 기운이 후끈하더니 한기가 덮쳤다. "어쩌지? 내가 몸이 안 좋아 앉아있을 수가 없는데."
그가 얼른 일어났다.
그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오빠를 대신해 사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몇 년 후에 그의 전화를 받았다.
만학도들의 인터뷰 중 나의 짧은 인터뷰를 어제 티브이로 봤다고. 나에게 또 한 번 놀랐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또 한 번 놀랐다니, 그럼 전에도 놀란 적이 있다는 얘긴데 그때가 언제였다는 거여?
그의 소식은 친구들에게서 간간이 듣고 있다. 아이들 다 결혼시키고 그의 아내와 고향 근처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성당 총회장으로 있으며 신학생들의 뒷바라지도 했던생전의그의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그가 살고 있는 고장의작은 성당에서 여러 단체 일도 맡아하며 지내고 있다고.
민준(큰아들)이와 예빈(며느리)이를 만나 남편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예빈이가 물었다. 어머님은 아버님 어디에 끌려서 결혼하셨느냐고.
큰 이모 소개로 만났는데 첫인상이낯설지 않더라, 아버지 고향 집성촌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을 서울서 만났는데 아버지가 친구들의 부모님 안부를 꼭묻더라, 만난 이들이 촌수로다손아래였는데 가장 위촌수인 아버지가 식사비를먼저 내고 커피 등 부차적인 것까지는 내지 않더라 자리를 끝내고 그들과 헤어져 둘이 집으로 가는 길에서 아버지가 말하더라2차 3차까지 아버지가 낼 수 있었지만 그러면 오히려 그들에게 우습게 보일 수 있어서 그건 그들이 내도록 두었다고 하더라 그 말에 결혼하면 이 사람이 나 안 안 굶기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예빈이가 손뼉 치며 말했다. "아, 호구 호구! 민준이도 어디 가서 호구짓 안 해요."
나는 말을 이었다.
젊어선 아버지의 허물을 잡고 늘어졌다고,
지금은 엄마의 더 큰 허물이 보이더라 아버지도 엄마 데리고 사느라 고생 많으셨지..
너저분히 말이 많았다.
예빈이가 다시 묻는다면 한 마디만 할 것 같다.
'아버진 사람이더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이차로 노래방을 가자고 했다. 남편 기분이 제일 좋을 때 하는 제의다.
예빈이도 노래방을 좋아해 다행이다. 민준이와 연애시절에자주 갔고, 요즘도 둘이 노래방을 자주 가고 있으니까.
노래하는 예빈의 목소리는 청아했다.
민준이는 '초혼'을 불렀다.
나는 예빈이 앞에서 잘난 체 하고 싶어졌다.
노래책을 펴 번호를 짚으며 민준에게 이 노래 여자키로 바꿔 누르라고 했다.
76년 종로에 있던 EMI 재수학원에 다닐 때 영어 선생님이 칠판에 가사를 쓰고 해석해 줘서 좋아하게 된 노래다. '영시의 다이얼'에서 들을 때마다 가사 내용이 궁금했었다.
<I REALLY DON'T WANT TO KNOW
얼마나 많은 사람의 팔이 당신을 안고
당신을 보내길 싫어했었는지
난 궁금해요
하지만 난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많은 입술들이 당신에게 키스하고
당신의 영혼을 달아오르게 했나요
난 궁금해요
하지만 난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날 언제나 궁금하게 하고
언제나 내가 짐작하게 해요
혹시 내가 당신에게 물을지라도
그대여 고백하지 말아요
그저 당신의 비밀로 남겨둬요
오 그대여 난 당신을 아주 사랑해요
당연히 당연히 난 궁금하죠
난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노래를 끝내고큰 박수를 받았다.
나는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 가족들을 향해 하트 표시를 했다. 예빈이가 와, 어머니 반전이다! 말했다.
민준이 예약해 놓은 노래가 이어졌다.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
나도 마이크를 들고 민준이와 함께 불렀다.
노래를 끝내자 예빈이가 놀라며 어떻게 화음까지 넣으며 부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화음은 기기에서 여성 합창으로 나온 거라고, 우린 멜로디만 불렀다고 했다. 예빈이가 아니라고 우겼다. 어머니가 분명 화음을 넣으셨다고. 나는 아 그랬나? 하며 슬며시 넘어갔다. 나는 예빈에게 화음까지 넣은 여인으로 있고 싶었으니까.
민준이가 말했다. 초등학교 때 엄마가 존덴버 노래를 자주 들었다고,민준이도 그때 들은 기억으로 불렀다고.
나는 민준이초등학교 사 학년 때 생일 선물로 비틀스 테이프를 사준 기억은 있으나 이 노래를 들은 기억은 없다고 말했다.
엄마 고등학교 때 많이 들은 노래로만 기억한다고 했다.
남편이 김현식의 '사랑했어요'를 불렀다.
예빈이가 식구들이 노래를 다 잘 불러 기가 죽는다고 말했다. 나는 예빈이도 잘 부른다고, 목소리가 청아하다고 말했다.
한 시간 노래부르고 노래방을 나오며
다음에 인천에 있는 서준(작은 아들)이오면 우리 가족 다 같이 노래방에 또 오자고예빈이가 말했다.
https://youtu.be/PcHuJY-XGDU?si=a9KZNsFWKgSM8Z_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