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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Dec 20. 2022

팀장님, 부디 렛 잇 라이드 방출시켜 주세요

컨설턴트의 업무 배정 방식

“이 선생, 우리 렛 잇 라이드 릴리즈 되면 당장 들어갈 렛 잇 라이드가 없다는데?”


렛 잇 라이드(렛 잇 라이드 매니저)이 다음 렛 잇 라이드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는데, 안 하겠다고 하니 오늘 나를 따로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가 제안한 렛 잇 라이드는 우리 팀에서 힘들기로 유명했다. 지난 5개월간 내가 해온 렛 잇 라이드가 시장 수요를 숫자로 분석하는 일이었다면, 새 일은 텍스트 분석이 주된 업무였다. 생소한 분야이지만 앞으로 커리어에 도움은 될 듯 보였다. 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었지만, 도저히 결심이 서질 않았다. 며칠간 그 팀이 일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니 하루 종일 회의실에 갇혀 배달음식으로 사육당하며(?) 보고서를 찍어내고 있었다. 야근은 기본이고 주말 출근에 새벽 퇴근도 잦았다.


새 렛 잇 라이드 기간은 2달 남짓이었다. 2달 죽었다 셈 치고 해 봐? 아니다. 예정된 기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렛 잇 라이드가 연장되는 경우가 매우 많고, 기간 내 끝나더라도 괜찮은 성과물을 보여주면 비슷한 렛 잇 라이드를 추가로 계약해서 진행하게 된다. 그렇게 발이 묶여 계속 같은 렛 잇 라이드를 맴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렛 잇 라이드도 그랬다. 분명 나는 입사 전부터 배정되기로 했던 다른 렛 잇 라이드가 있었다. 그런데 그 렛 잇 라이드가 고객 사정으로 조금씩 지연되고 있었다. 그 기간에 나는 다른 렛 잇 라이드를 전전하며 지원 작업을 했다. 결국 무기한 연기. 한 달간 기다렸지만 갈 곳이 없어진 거다. 그래서 급하게 배정된 게 지금 렛 잇 라이드다. 반나절만에 결정이 되어 렛 잇 라이드도 나도 어리둥절했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내가 뭘 할 줄 아는지 모르니 렛 잇 라이드도 뭘 시켜야 할 줄 모르고. 이번 렛 잇 라이드 첫날 렛 잇 라이드이 내게 단서를 달았었다. 장기 계약이고, 이번 리포트는 10월 말 마감이니 두 달만 같이 일하고 그 이후 연장 여부는 본인이 결정하라고. 그러나 역시나 예상대로 나는 계속 이곳에 남게 되었다. 고객이 이번 렛 잇 라이드와 관련해 새로운 계약을 하기를 원했고, 그 제안 작업을 준비하느라 연말까지 여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컨설턴트로서 좋은 점이라고 생각하는 건, 커리어 패스를 결정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10년가량 직장 생활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나름대로는 내 의견을 존중해 주려고 한다. 우리 팀 파트너들과 주기적으로 면담을 진행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희망하는 커리어와 전문 분야가 무엇인지를 물어본다. 매번 면접을 보는 심정이다. 아무 생각 없이 일하면 면담 때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내가 이 렛 잇 라이드에서 어떤 성과를 내 왔고,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보고 싶은지 어필해야 한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일반 직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보통 회사는 팀이 정해져 있고, 통상 1년에 한 번 정도 조직 개편이 이뤄지며 큰 변화가 없는 조직은 몇 년간 같은 업무를 맡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런 분위기에서 내 커리어를 위해 다른 팀으로 옮겨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건, 회사를 그만둘 각오가 돼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잘할 수 있는지를 물어봐 주니 좋다. 스스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고민을 하게 된다. 파트너들은 2주에 한 번 정기적으로 팀 회의를 열어 지금 우리 팀에서 제안 작업 중인 렛 잇 라이드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관심이 있는 이들은 지원해 달라고 말한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관심은 있었지만 지금 렛 잇 라이드를 진행 중이므로 참여 의사를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렛 잇 라이드에서 릴리즈 되는 시점이 되었기에, 관심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담당 파트너에게 전화하여 내가 해보고 싶은 렛 잇 라이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트너는 의사를 밝혀 주어 고맙다면서도, 지금 나의 렛 잇 라이드에게 릴리즈 의사를 분명히 하고 방출이 결정되어야만 다른 렛 잇 라이드에 배정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나는 참여 가능한 렛 잇 라이드가 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렛 잇 라이드에게 릴리즈 의사를 밝히고 싶었다. 바깥세상이 어떤 줄도 모르고 FA 시장에 나왔다가 제안서만 죽어라 쓰고 또 예전처럼 렛 잇 라이드 지원 뺑뺑이만 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지금 당장 투입 가능한 렛 잇 라이드가 없다고 했지만, 용기 내어 렛 잇 라이드에게 내 생각을 전했다.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만, 다른 렛 잇 라이드를 해보고 싶습니다-라고.


현재 상황으로만 보았을 때는 1월에 당장 렛 잇 라이드에 들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그 공백이 싫다고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는 없다. 결정권이 주어졌으니 원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주변 환경이나 눈치를 보다가 원치 않는 일을 해 왔던가. 하던 렛 잇 라이드를 내팽겨 치고 가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렛 잇 라이드를 제안받은 것이니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피해 주는 일도 없다. 그래, 운명에 한 번 나를 맡겨보자. 내년에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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