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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은 왜 발생하며, 잠재성은 왜 부정되는가?

기억의 이중적 역할


‘룸카지노의 특징을 조금 더 살펴봅시다.


기억은 자신의 깊은 뿌리들에 의해서 과거에 밀착되어 있다.그런데 만약 일단 현실화된 기억이 자신의 원본적인 잠재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달리 말해,기억이 현재적 상태인 동시에 현재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면,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기억이라고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당연히 “기억은 자신의 깊은 뿌리들에 의해 과거에 밀착되어” 있겠죠. ‘기억’은 지금 우리를 있게 한 뿌리(과거) 그 자체니까요. 그런데 이 ‘기억’은 단지 과거의 일만인 것은 아니죠. ‘기억’은 현재에도 깊이 뿌리내리고 있죠. 우리는 ‘기억’을 통해 현재를 ‘지각’하잖아요. 즉, “현실화된 기억”이 바로 ‘지각’이잖아요.


화재 사고의 기억이 있는 이들과 그런 기억이 없는 이들이 지금 불을 지각하는 상황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현실화된 기억(지각)이 자신의 원본적인 잠재성(순수 기억)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죠. 우리는 모두 ‘기억’의 자장 안에서 현재를 ‘지각’할 수밖에 없죠. 이는 기억의 이중적 역할을 드러냅니다.


‘기억’은 분명 현재가 아니죠.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이 (현재와 아무런 상관없는) 과거인 것도 아니에요. 즉, ‘기억’은 “현재적 상태인 동시에 현재와 뚜렷이 구분되는 어떤 것”이죠. 즉 ‘기억’은 과거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현재이기도 한 거죠. 만약 ‘기억’에 이런 이중적 역할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기억이라고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화재의 ‘기억’이 단지 과거의 회상에 그칠 뿐, 현재 불에 대한 어떤 경각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상상’이나 ‘망상’이라고 볼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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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연합론’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들리는 이 말이 오래된 삶의 오해 하나를 바로 잡아 줍니다. 그 오해는 바로 ‘관념연합론(연상주의)’입니다. ‘관념연합론’은 뭘까요? 데이비드 흄이 대표적인 ‘관념연합론’자에요. 흄의 이론으로 ‘관념연합론’에 대해서 설명해 볼게요. 흄은 ‘지각’을 두 가지로 구분해요. ‘인상’과 ‘관념’이에요. 지금 불에 데었다고 해 봐요. 그 생생한 고통(경험)이 있겠죠? 이것은 ‘인상’이에요. 그런데 그 생생한 경험(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약해지게 되겠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 ‘관념’이에요. 즉 ‘인상’(앗 뜨거!)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약해진 것이 ‘관념’(그때 불에 데었지)인 거죠.


이런 ‘관념합론’자는 ‘기억’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불에 덴 생생한 고통(지각)이 있고, 시간이 지나 고통이 약해지면 그것이 ‘기억’(상 기억)되고,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면 그 고통은 흐릿하고 모호한 ‘기억’(순수 기억)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겠죠. 즉, ‘관념연합론’자들은 ‘기억’을 ‘지각→상 기억→순수 기억’으로 파악해요. 이는 베르그손의 관점과 반대죠. 베르그손은 먼저 ‘순수 기억’이 있고, 거기서 ‘상 기억’이 나오고 그로 인해 ‘지각’이 가능하다고 말하잖아요. 그래서 베르그손은 ‘관념연합론’이 명백한 오류라고 말해요.


그들(관념연합론자)은 지각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하는 감각의 집합만을 보려고 할 것이다.그들은 지각의 모호한 핵을 형성하는 재기억된 상을 보지 못할 것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관념연합론’자는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상태에서 “생생한 감각의 집합만을 보려고” 하죠. 그들은 장작불을 ‘지각’할 때 무엇을 볼까요? 불이 활활 타고 있는 따뜻한 감각(시각·촉각)의 집합만을 보겠죠. 이는 진실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죠. 우리가 장작불을 볼 때 붉고 따뜻한 감각만을 보는 게 아니죠. ‘지각’에는 언제나 ‘모호한 핵’이 있어요. 그 ‘모호한 핵’에 의해서 ‘지각’은 저마다 달라질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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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연합론’으로는 세계를 제대로‘지각’할 수 없다.


어린 시절, 캠프파이어를 했던 ‘기억’을 가진 이와 화재 사고를 당했던 ‘기억’을 가진 이를 생각해 봐요. 둘이 같은 장작불을 ‘지각’한다고 해서 같은 것을 보는 게 아니죠. 그 둘의 ‘지각’은 다를 수밖에 없잖아요. 이는 ‘지각’이 가진 “모호한 핵” 때문이죠. 이 “모호한 핵을 형성하는” 건 “재기억된 상”, 즉 ‘상 기억’이죠. ‘지각’에는 이미 항상 어떤 ‘상 기억’이 개입되어 있잖아요. 동일한 감각의 집합(장작불이 빨갛고 뜨겁다)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상 기억’(캠프파이어냐? 화재 사고냐?) 따라서 ‘지각’은 미묘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죠.


하지만 ‘관념연합론’자들은 “지각의 모호한 핵을 형성하는 재기억된 상을 보지” 못하죠. 그들은 장작불에서 모든 이들이 그저 빨갛고 뜨거운 불만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들에게 ‘지각’은 오직 ‘인상’ 즉 생생한 감각의 집합일 뿐이니까요. 쉽게 말해, ‘관념연합론’자들은 ‘지각’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상 기억’을 무시해 버리는 거죠. ‘관념연합론’자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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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번에는 재기억된 상이 문제가 되는가?사람들은 그것을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즉 약한 지각의 상태로 실현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이로써 이 상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순수 기억에 대해서 눈을 감게 될 것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관념연합론’자는 ‘상 기억’(재기억된 상)을 어떻게 바라볼까요? 그것은 단지 ‘인상’이 약화 된 것, 즉 “약한 지각의 상태로 실현”된 것일 뿐이죠. 이러한 관점은 더 심각한 문제를 낳죠. ‘캠프파이어’ 혹은 ‘화재 사고’라는 ‘상 기억’은 어디서 왔나요? ‘순수 기억’이죠. ‘관념연합론’자는 “순수 기억에 대해서 눈을 감게 될” 수밖에 없죠. 왜냐하면 ‘관념연합론’자들에게 ‘상 기억’이든 ‘순수 기억’이든 그것은 모두 ‘인상’이 약해진 ‘관념’일 뿐이니까요.


관념연합론은 지각은 항상 상 기억을 대치하고,상 기억은 항상 순수 기억을 대치할 것이다.그런 이유로 순수 기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린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관념연합론’에서 ‘지각’은 항상 ‘상 기억’을 대치하죠. 장작불을 ‘지각’했다면, 그 ‘지각’이 곧 ‘상 기억’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상 기억’은 ‘순수 기억’을 대치하죠. 왜냐하면 ‘관념연합론’에 따르면, ‘지각’이 흐릿해져서 ‘상 기억’이 되는 것이고, ‘상 기억’이 더 흐릿해져서 ‘순수 기억’이 되는 것이니까요. 이는 종국적으로 ‘관념연합론’에서는 ‘순수 기억’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리게” 된다는 사실 의미하죠. 굳이 말하자면, ‘관념연합론’자에게 ‘순수 기억’이란 ‘인상’이 아주 약화 된 ‘관념’인 뿐인 거죠.



‘관념연합론’은 기억을 독립된 원자 상태로 본다.


관념연합론의 일관된 잘못은 생생한 실제 자체인 연속적인 생성을 불연속적인 다수의 죽어 있고 병치된 요소들로 대체하는 것이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관념연합론’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모든 ‘지각’, ‘상 기억’, ‘순수 기억’은 모두 연결되어 연속적인 생성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관념연합론’은 그 “실제 자체인 연속적인 생성을 부동적이고 병치되어 있는 불연속적인 요소로” 대체하죠.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우리는 살아가면 많은 경험들을 하죠. 불에 데기도 하고, 칼에 베이기도 하고, 포옹과 입맞춤을 하기도 하고 이별을 하기도 하죠. 이 모든 경험들은 모두 연결되어 “연속적인 생성”을 하죠. 그래서 포옹과 입맞춤을 하는 사랑을 뜨거운 불처럼 느끼고, 이별을 칼에 베이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관념연합론’은 이 모든 경험(연속적인 생성)을 각자 고정되어 불연속적인 독립적인 요소로 대체함으로써 다수의 죽어 있는 상태로 파악하죠. 즉, 불에 덴 경험, 칼에 베인 경험, 포옹과 입맞춤한 경험, 이별의 경험은 각각 ‘인상’에서 ‘관념’으로 이어질 뿐, 이 경험들이 모두 연결되어 “생생한 실제 자체 연속적인 생성”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거죠.


관념연합론의 원리는 모든 심리적 상태가 일종의 원자,즉 단순한 요소이기를 원한다.물질과 기억앙리 베르그손


관념연합론은 모든 심리적 상태를 모두 개별적으로 독립된 원자 상태로 보는 거예요. 불에 덴 경험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상태가 있고, 칼에 베인 경험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상태가 있고, 포옹·입맞춤·이별이 만들어내는 심리적 상태가 있는 거죠. 이는 모두 원자 상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이것이 ‘관념연합론’자들의 근본적인 오류죠.



‘관념연합론’은‘선입견’을 촉발·강화한다.


이런 ‘관념연합론’적 태도는 우리네 삶에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킬까요? 첫째, ‘선입견’을 촉발·강화 시킬 수 있죠. ‘관념연합론’은 ‘지각’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한 사람이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각’한다고 해봐요. 어떤 이는 그것을 ‘성실’로 보겠지만, 또 어떤 이는 ‘탐욕’로 보기도 할 겁니다. 전자는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보니 성실한 사람이 틀림없어”라고, 후자는 “저렇게 미친 듯이 일하는 거니 보니 돈에 환장한 사람이 분명해”라고 ‘지각’하겠죠. 그리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지각’이 결코 틀리지 않다고 확신하겠죠.


이런 ‘지각’에 대한 오해는 어디서 올까요? 바로 ‘선입견’이죠. ‘관념연합론’적 태도는 ‘선입견’의 씨앗이 되는 측면이 있어요. ‘선입견’은 무엇인가요? 본인이 어떤 관점을 미리 갖고 사태를 ‘지각’하는 것이죠. 이는 무엇이 문제인가요? 어떤 관점을 미리 갖고 어떤 상황을 ‘지각’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인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태가 바로 ‘인상’이잖아요.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을 보고 ‘탐욕’스러운(혹은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고, 그 ‘인상’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일은 흔하죠.



하지만 ‘인상’은 결코 정확한 ‘지각’이 아니죠. ‘지각’에는 항상 ‘상 기억’이 중첩되어 있으니까요. 각자 가진 ‘상 기억’을 바탕으로 ‘열정’을 ‘성실’로 ‘지각’하거나 ‘탐욕’으로 지각하게 되는 것일 뿐이죠. 우리네 삶을 정직하게 돌아봐요. ‘열정’적인 이가 자신에게 유익을 준 기억이 있다면 ‘성실’로 ‘지각’하게 되고, 반대로 ‘열정’적인 이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기억’이 있다면 ‘탐욕’으로 ‘지각’하게 되는 거잖아요.


‘관념연합론’은 우리의 ‘지각(현재)’에 ‘상 기억(과거)’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죠. 즉 현재는 단지 현재라는 것이죠. 이러한 오류는 ‘선입견’을 촉발하고 강화할 가능성이 크죠. 반면 베르그손의 이론으로 세계를 ‘지각’하게 되면 ‘선입견’은 약화 될 수밖에 없죠. 이는 논리적으로 자명하죠.


물론 베르그손의 이론 아래서도 ‘열정’을 ‘성실’로 혹은 ‘탐욕’으로 ‘지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지각’에는 이미 자신의 특정한 기억(상 기억)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잖아요. 쉽게 말해, “열정적인 그가 탐욕스럽게 보이는 이유는 내가 비슷한 사람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이구나”라는 사실을 성찰할 수 있게 되죠. 이런 성찰이 가능한 이들은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될 겁니다.



‘관념연합론’은 우리의 잠재성을 부정한다.


‘관념연합론’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죠. ‘관념연합론’은 우리의 잠재성(잠재적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기능하는 측면이 있어요. ‘관념연합론’에서는 ‘지각’은 ‘상 기억’을 대체하고, ‘상 기억’은 ‘순수 기억’을 대체하죠. 그래서 궁극적으로 ‘순수 기억’은 사라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순수 기억’은 우리의 잠재성이잖아요. 무한한 ‘순수 기억’ 중에서 어떤 것이 ‘상 기억’화 되느냐에 따라 다른 ‘지각’을 갖게 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죠. 그런데 ‘관념연합’론에서는 ‘순수 기억’을 감추어버리기 때문에 잠재적 가능성마저 감춰지게 되는 거죠.


우연히 들어선 어느 미술관에서 알 수 없는 강렬한 떨림을 느낀 사람이 있다고 해 봐요. ‘관념연합론’자와 ‘베르그손’주의자가 그 떨림을 해석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를 거예요. ‘관념연합론’자는 그 떨림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한 그림을 보고 받은 ‘인상’일 뿐이라고 여길 겁니다.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 ‘인상’은 곧 ‘관념’으로 바뀔 것일 뿐이니까요.


반면 ‘베르그손’주의자는 어떨까요? 그 ‘떨림’으로 화가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어느 그림 앞에서 강렬한 떨림을 느꼈던 건, 자신조차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순수 기억)이 지금 자신을 끌어당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이는 지극히 ‘베르그손’적인 인식이죠. 그 ‘떨림’은 ‘순수 기억’(잠재성)이 ‘상 기억’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다시 지금의 ‘지각’(떨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의해 발생한 것이니까요.


‘관념연합론’은 ‘순수 기억’을 제거해 버립니다. 이는 우리의 무한한 잠재성을 제거해 버린다는 말과 같아요. 익숙한 불행을 끝내고 낯선 행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있는 잠재성을 발견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하죠. 베르그손은 그 잠재성을 ‘순수 기억’이라는 형태로 발견하고 긍정하죠. 반면 ‘관념연합론’은 ‘순수 기억’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잠재성마저 인정하지 않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거죠. ‘철학’은 중요합니다. 어떤 ‘철학’(이론)을 받아들이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현격히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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