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플레이은 영혼이 갈리는 일이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머물지 못해 영혼이 갈려버린 이들이 정착한 영토, 케이플레이.
‘일상’은 케이플레이의 마름이다. 케이플레이의 마름은 고립이며 물질이며 질식이다. ‘케이플레이’은 케이플레이의 넘침이다. 케이플레이의 넘침은 혼란이며 불안이며 충동이다. 케이플레이이 메마른 자들은 물질 속에서 고립되어 질식할 것이다. 케이플레이에 휩쓸려 가는 자는 혼란 속에 불안으로 충동의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
‘일상’에 매몰된 자는 ‘미술관’을 가지 않는다. 그들의 안정은 고립, 물질, 질식에서 온다. 하여 그들은 ‘미술관’을 가지 않는다. (진짜로 가보았다면) ‘미술관’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미술관’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진동해서 호흡하게 만드는 공간이기에, 그곳은 일상의 안정을 파괴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미술관’은 일상의 매몰된 케이플레이 영혼을 갈아버릴 것이다.
‘케이플레이’에 침잠된 이들은 ‘미술관’을 찾는다. ‘미술관’에서 찾아오는 케이플레이적 동요는 기쁨이 아니다. (기쁨을 느낀다면, 허영이거나 회피이다) ‘미술관’이 촉발하는 케이플레이적 동요는 혼란이며 불안이며 충동이다. 나의 케이플레이이 넘치는지 모를 때, 나 자신도 모른 채로 케이플레이이 넘치기를 바랄 때 ‘미술관’을 배회한다. 케이플레이에 침잠된 이들은 케이플레이이 넘치는, 넘치기를 바라는 자들이다. ‘미술관’은 케이플레이에 침잠된 자들의 영혼을 갈아버릴 것이다.
‘일상’과 ‘케이플레이’ 넘어 ‘수행’이 있다. ‘수행’은 케이플레이의 중도이다. 메마르지도 넘치지도 않는다. 케이플레이의 중도는 감응이다. 감응은 차가운 애욕이며, 뜨거운 냉소이다. 그것은 사랑이며 자비이다.
차가운 냉소로는 '수행'이 시작될 수 없으며, 뜨거운 애욕으로는 '수행'이 빗나가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케이플레이의 사막을 지나 케이플레이의 범람에 이른다. 그들은 다시 혼란, 불안, 충동의 세계로 들어간다. 범람하는 케이플레이이 없다면 세계와의 감응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자는 ‘미술관’을 돌아 나와 ‘글’을 쓴다. 그들은 흘러넘치는 케이플레이을 ‘안’이 아니라 ‘밖’으로 쏟아낸다. '밖'으로 쏟아내어 범람하는 케이플레이을 고요하게 만든다. 비로소 '너'를 본다. 수행하는 자는 불타오르는 애욕에 찬물을 끼얹어, 차디찬 냉소를 화염 속에 던져서 진정한 사랑에 이르려 한다. 수행하는 자는 ‘미술관’을 갈아버릴 것이다.
깨달은 자들의 세계에 케이플레이 없다. 그곳에서 ‘너’를 사랑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