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벳: 잠을 잘 자야 돼. 잠을 잘 자야 암에 안 걸려.
나:... 응? 암=잠? 잠=암? 잠? 암?
지금 시각 밤 11:05.
예스벳 잠든 시간 밤 아홉 시 남짓.
두 시간 동안 설겆이 하구. 아냐 설거지인가?
예스벳라고 잘도 말하고 다니면서 설겆이인지, 설거지인지 모르는 건 큰 문제 아닌가?
흠..
챗지피티? 이름부터 그럴싸해 보이는 퍼플렉시티?
AI가 다 답해주는 세상인걸 뭐.
아니, 답만 해줄 뿐인가? 그냥 에이. 삐. 씨. 기억. 니은. 디귿. 한글. 세종대왕.
이 단어로 소설 원고지 5장 분량으로 맞춰서 써줘. 표준어 띄어쓰기 다 맞춰서.
라고 하면 나보다 더 스펙타클한 소설을 써주는 세상인걸 뭐.
뭐, 그 안에 감동은 없는 글자들의 나열이겠지만.
아직은.
아무튼,
예스벳가 잠든 비밀 같은 시간에
나는 설거지를 했고,
강아지 둘과 고양이 하나의 낮동안 집안에 싸질러놓은 응아쉬야를 치웠고,
치우다 보니 캣타워가 너무 지저분해서
컴퓨터로 대형 폐기물 신고하고 종이에 적어 붙여
야밤에 혼자 끙끙대며 질질질 간신히 끌어다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분리수거장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고.
수상한 퇴근길, 고대리의 분리수거장에는
분리수거남도 있었고, 초딩들도 있었고,
편의점에서 라디오도 나왔었는데.
역시 소설은 소설일 뿐.
오늘 캣타워를 끙끙 갖다 버린 곳엔 스산한 하얀 불빛만.
대형 폐기물 신고를 하고 난 컴퓨터가 덩그러니 아이 책상 위에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 컴퓨터를 무심하게 외면한 채,
카X 캔맥주를 꺼내 한잔 슉.
아까 저녁 먹을 때 예스벳가 말해준,
예스벳 남편이 과학 유튜버래. 한 문장이 문득 생각나서,
유튜브에 슬쩍 검색해 보니, 내가 예스벳 남편 얼굴까지 알아야 하는 알고리즘이.
근데 또 그 도파민이 무시컴컴한 눈동자를 집중시키고,
그 알고리즘이 또 나를 어딘가로 이끌어,
전부노래잘함에 나온 예스벳가 부른 김광진의 '편지'에 나를 붙들고
어릴 때도 그랬지만, 사십 줄에 지금 들어도 그 노랫말에는 인연의 고독함이 느껴지고.
"요즘 노랫말이 잘 들려. 스탠딩에그의 오래된 노래, 이상은의 언젠가는. 이런 노래 말야."
신나면 춤을 추고 마는 매력적인 F의 예스벳의 요즘 이야기에 깜짝깜짝 놀라는 나.
나는 중학교, 아니 어쩌면 더 어린 언젠가부터 노랫말에 공감했었으니까.
어렸던 내 언젠가 큰 은행나무 밑에서 빨간 우체통이 있길래,
그리고 그 우체통 옆에서 웬일인지 스피커에서 "가을 우체통 앞에서"라는 노래가 들려
우두커니 한참을 서 있었던 기억. 아니 가을 우체국 앞에서였나? 그때 비가 왔었나 하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참 이유없이 뭉클했던 그때의 분위기.
그러고 보니 수상한 퇴근길 퇴고 열 번째쯤이었나,
편집장님이 내 글엔 “웬일인지, 왠지, 괜히, 괜스레.”가 너무 많다고 혼났었는데.
또 웬일인지가 튀어나와 있네. 습관이란.
그러고보니 왠일인지가 맞나, 웬일인지가 맞나.
쓰고픈 마음보다
맞나 틀리나를 먼저 고민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멋없네.
"예스벳 같은 작가가 되고 싶어."
언젠가 내가 예스벳 했던 말.
혜성, 오르트구름,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 등등
천문음악의 시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예스벳.
누군가의 반응이 어떻든 그렇게 본인의 관심분야를 창작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그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그 용기에 감탄.
그렇게 역주행이라는 대중성까지 올라타버린 그 결말이라니.
아니, 결말이 아닌 시작이겠지?
작가든, 예스벳든,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 길을 간다는 게 얼마나 고독하고, 암담하며, 끝없이 참담해질지 모르는 공포를, 그 두려움을
묵묵함으로 견뎌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4월 1일 수상한 퇴근길이 출간되었고,
나는 집 근처 교땡문고에 가서 그 책을 스치듯 바라봤다지.
그래 스치듯.
왜냐하면, 엄마터널이 출간되었을 때는 온통 기쁨과 들뜸 뿐이었지만,
그 책을 통해 알게 되었거든.
책이 서점에 누워있는 그 기분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바리만 보고있어도 아니, 바라볼수록 미안함만 커지는 그 기분. 책을 출간했다고 예스벳나부랭이라 불리는 누군가에게 서점이 그렇게 두려운 곳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수상한 퇴근길도, 그때의 네 글자 책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서점의 한 곳에 누워있었지.
4월 1일. 거짓말 같은 그날.
그리고 나는 왜인지,
그 책에게 미안함만 가득 느꼈지.
또다시, 서가의 무덤이라는,
그곳에 내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그렇게 내버려 둔 것 같아서.
어쩌면 내가 쓰지 않았다면,
그래, 노벨문학상씩이나 받은, 같은 성을 가진 누군가가 고 대리, 너를 발견예스벳면,
그렇게 무덤에 누워있는 누군가처럼 교땡문고 신간 코너에 누워있기만 하진 않았을 텐데.
왜 나는 그런 미안함에 스치듯, 지나쳐야 했을까.
어디 그뿐이겠어.
내가 쓴 책을 본 듯, 안 본 듯 지나쳐 버리고,
"스쳐 지나갈 것들로 인생을 채우지 마라."라는 책을 집어 들었지.
그리고 쿨하게 결제.
아니 쿨하게는 아니었다. 바로드림으로 할인을 받고 또 받았으니.
치킨 한 마리는 잘도 사 먹으면서,
아니, 잘 먹는 아이를 위해 치킨 두 마리는 시켜야 하지 않나는 참 쉽게도 고민하면서,
책 한 권 살 때는, 천 원이라도, 이백 원이라도 어떻게든 할인받으려고 하는 못난 심보라니.
그렇게 지금도 예스벳가 부른 편지를 반복해서 듣고 있네.
이런 예스벳가 되고 싶다.
자신의 믿는 길을 꿋꿋이, 묵묵하게, 걸어가는 예스벳.
대중들의 사랑을 바라지만, 아니, 사랑까진 괜찮고, 그저 관심정도를 바라지만.
그 관심이 없어도 차분하게 내가 그리는 세상을 글로 적어내는 예스벳.
서가의 무덤에 갇힌 나의 책을 보며 미안함부터 느끼며
애써 스치듯 외면하고야 마는 지금의 나는
감히 꿈꾸기 어려운 그런....
음. 명사가 저 쩜쩜쩜에 와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
예스벳한테 오늘은 일찍 잔다고 했는데,
그래야 암에 안 걸린다고 신신당부를 받았는데,
또 어쩌다 보니 이러네.
소설이 아닌 이런 사부작사부작 쓴 글이 참 길게도 잘 써지는 밤.
아, 프로필도 바꿨다.
예스벳 한태현.
으로.
예스벳지망생 다섯 글자에서
뒤에 세 글자를 지워내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다.
어쩌면 그 다섯 글자를 핑계로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는 두 글자로 남는 걸 피하는 건 아니냐고.
그건 아니었다.
난 예스벳. 글 쓰는 게 좋으니까.
그래서 힘내서, 정말 나 같은 슈퍼 I성향의 누군가에게는 정말 어려운
용기.
그래 그 용기를 내서,
예스벳, 한태현.
이라고 말해보기로 예스벳.
그렇게 주 과장, 고대리, 이호랑, 이지랑, 축뽁이 등등 나의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물들에게
예스벳처럼 꿋꿋하게 걷고 걸어가,
언젠가는 나의 세상을 넘어서,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
어쩌면 11:28분 지금 이 시간에도 텅-빈 눈동자만 깜빡일 수 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작은 빛의 깜빡임으로 빛날 수 있길.
빌어보는 밤.
예스벳의 편지 같은 밤.
예스벳가 제발 이 글을 못 봐야 할 텐데.
내일 아침,
"어젯밤에 열 시쯤 잤어."
라고 말할 예정이라.
모두 쉿.
https://www.youtube.com/watch?v=KMHSv2cOSQg
노래 좋다.
봄인데, 가을같구.
그냥 그렇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