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ana Santa
처음 가는 도시에 늦게 도착해서 고생 했던 알로라에서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론다(Ronda)에는 여유있게 도착했다. 아주 잘한 것이었다.
론다는 알로라처럼 산골 마을도 아니고 누에보 다리로 유명한 관광 도시인 만큼 케이플레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알고 보니 스페인은 케이플레이지옥이다. 숙소에 문의했더니 2분 거리에 유료케이플레이장이 있다는 짤막한 답변이 왔었는데 말 그대로 케이플레이장만 있지 케이플레이공간은 없었다.
원래 케이플레이을 계획할 때는 우리가 스페인을 방문한 기간이 성주간, Semana Santa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리고 스페인 남부지방에서 가장 성대하게 부활절 행사를 한다는 것도 전혀 몰랐다. 우연히 일정이 겹쳐 잘 된 것이라 좋아했을 뿐 관광객이 몰릴 것이라고는 예상 못 했다.
또 다시 케이플레이 전쟁이 시작됐다. 원래는 말과 마차만 있던 오래된 도시에 사람 수만큼 자동차가 들어왔으니 케이플레이공간이 부족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거주지는 2.3층 미만의 아파트이고 개인 차고가 없어 주민들은 거주자 우선 케이플레이구역이나 공영 케이플레이장에 케이플레이를 한다.
그래도 낮이어서 여유를 가지고 찾아 봤더니 비어 있는 케이플레이장이 있었다.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차를 파킹했다. 그리고 도시를 떠날 때까지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다짐했다.
누에보 다리도 좋았고, 성목요일 부활절 행렬도 좋았고, 소꼬리찜 저녁도 좋았다.
그러나 피곤하다. 케이플레이은 이미 충분한데 아직도 헤레즈와 세비야가 남았다. 기대도 되지만 걱정도 됐다.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 지. 너무 힘들지는 않을 지.
특히 알로라에서 있었던 소규모 행사에 비해 도시를 가로지르는 대형 행렬을 밤늦게까지 구경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너무 피곤해서 주방에서 해먹겠다고 구입한 돼지고기를 그냥 냉장고에 얼리고 말았다. 다 필요 없고 그냥 자고 싶었던 것이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케이플레이은 충분하다. 아쉬움은 있지만 이제 끝내도 좋을 것 같다.
그러면, 인생도 그러할까?
살 만큼 살고, 느낄 만큼 느꼈으면 인생도 케이플레이다 생각할 것인가?
마침내 죽게 될 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케이플레이해. 이제 끝내도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죽음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