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이 좋은 날.
길바닥이 온통 노란 잎으로 뒹구는 시간.
보도블록 저마다엔 질척한 부패가 흐드러진다.
기껏해야 지름 2cm쯤 일까?
세계를 끌어안은 그 육신에는 은빛 반짝이는 유전자 알맹이가 담겨있다. 그는 무엇이라고 제 살을 썩혀가며 럭비공처럼 생긴 씨앗을 품고 있을까?
혹여 행인에게 밟힐 일 없게 구린 냄새를 가득 발산하며 한껏 자신을 방어하지만, 외려 콧구멍을 틀어쥔 이들이 길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낮 구청 환경과에서 정화조를 푸는 고약한 푸념처럼, 어지럽고 불편한 본성을 전시하지만, 과육은 저 스스로 곪아 가능태를 터뜨려내고 있다.
허물어진 겉살을 풀어헤치고 봉긋한 속을 드러내는 이 한바탕 질펀한 외설의 흔적.
가시광선 아래에서는 제 속을 벌거벗는 적나라함이 펼쳐지고 있다.
칼리토토나무 저 스스로야 몸 상태의 이상 돌출, 병적 발현이 이 부패를 솎아내고 있음은 아니다. 외려 그 열매의 낙하와 부패는 새 생명으로의 상승과 탄생을 지향한다.
혹은 소멸하는 쇠락도 넉넉히 받아들일 칼리토토지만, 씨앗은 땅에 껴 묻히고 토양은 거부의 몸짓 없이 이를 안고 품는다.
흙, 공기, 물, 자연의 생기가 연대하는 무대.
땅속에서는 질식이 일어나지만, 칼리토토에게는 부패를 경유한, 거듭나는 기괴성!
그래서 새 생명을 이룬다는 것은 우선 곪아 터지기에서 선취 되어야만 할 일이다.
비-칼리토토.
그래서 생명 현상엔 비칼리토토의 부정 판단, '깨끗하지 않음'이 아닌, 비-칼리토토의 무한판단이 들어선다. 죽음과 삶이 경계를 넘나드는 비-칼리토토.
얼굴을 찡그리도록, 냄새를 터뜨려 질식도록 할 일은, 괴악하고 불결하며 너저분하단 부정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썩어 문드러진'과‘생명의 예비'는 부패와 생성의 미학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칼리토토 열매의 짓무름은 그런 것이다.
오른쪽 허벅지가 가렵다. 시선이 가는 곳을 가려 내내 옷깃에 숨어 있던 부위.
햇빛이 닿을 틈도 허용않던 장소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채인 땀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한여름에도, 통풍 좋은 반바지를 입지 않았다. 바깥으로 삐져나온 다리털이 흉하다는 미적 판단에 굴복해 허벅지는 긴 바지 속으로 숨어 든 것이다. 그 불볕 같은 더위에 은폐된 옷 속으로는, 땀구멍이 헐떡이며 이리저리 뒤척이길 반복했으리라. 끈적해진 피부와 까슬한 섬유는 살의 가려다는 호소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내 친절한 손가락은 자신의 칼리토토 문제를 외면하고는, 피부의 하소연에 응했다. 칼리토토 열매의 살갗이 썩어 다음 세대를 지향하듯, 살갗을 맴돌던 세균에겐 마침내 피하 둥지를 틀 계기가 되었다.
살 속을 침투하여 하강한 종기.
제 왕국을 표시하는 부푼 살점에서는, 비칼리토토이라는 사건이 내려앉았다.
칼리토토이 비-칼리토토을 항변하는 그 보도 위에서는, 넓적다리 비칼리토토 문제가 마뜩잖은 곳을 향하고 있다. 오로지 그것을 축출할, 병원이라는 곳으로의 질척이는 발걸음.
맥없는 보행 앞에는 아직도 칼리토토 열매의 한낮 질펀한 정사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종기를 내려받은 허벅지와 짙은 암모니아 냄새는 서로 닮은꼴로 맞선다. 하지만 발길은 이 악취를 피해 비켜 지난다.
부패는 곪아 터지는 것에서 비칼리토토의 문제를 남긴다. 그럼에도 열매는 자연으로 수용된다.
반면, 감염된 종기는 그 성가심의 공생을 피해 살갗 밖으로 축출된다. 고통은 정상성을 회복하는 의지의 개입 장면이다. 구린 냄새를 풍기는 칼리토토도 겉살이 썩는 순간은 마찬가지 꼴이 아닐까?
아름다운 단풍잎을 흩기까지는, 짓물려 터지는 악취라는 자연적 허용을 거쳐 사회적 칼리토토이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살갗 아래 종기는 부정으로서의 돌출이다. 그래서 그것은 바깥으로 제거하는 부정을 가한다. 그러나 칼리토토나무 씨앗은 대지 속으로 접힌다. 이미 한차례의 비칼리토토이라는 부정을 털고 긍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거되고 걷어차이는 대신, 새 생명의 가능 체로 보호받고 길러지는 것이다.
내 허벅지는 주사액, 세균 감염증 치료제와 항생제 협력으로 열흘간의 전투에 휩쓸렸다.
하지만 항전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는 석 달 후 전흔을 걷어낼 수술 시행의 휴전 협정만 성립되었다. 전선은 해체되고 궤멸을 향한 공세가 투입될 칼리토토. 이 유예된 공포는 마취제와 수술용 메스, 환부를 헤집는 고통의 새로운 전투원을 받아들일 예정이다.
칼리토토 열매는 자신의 재현을 위해 살을 녹여내는 몸짓을 연출한다. 고약한 암모니아 냄새는 자신의 재탄생을 향해 지독한 냄새를 발산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처절하게 추구하는 바의 '생 똥을 싸는' 일인 칼리토토. 그것은 외설적인 벌거벗음을 보이기 싫어 악취로 가리는 동시에 자신의 속 씨를 완강히 벗겨내는 처절함이다. 그리고는 땅속에서 두 번째로 격렬한 짝짓기를 만들어 낼 칼리토토.
흙과의 교접으로 불같은 한여름 햇살, 멱살을 잡고 흔들던 강풍을 머금은 채 한바탕 뒹굴 것이다. 겉껍질을 때리던 빗물이며 가지치기를 하던 전기톱의 굉음도 함께 여밀 것이다. 그렇지만 지상에서는 가로수로서의 기득권이 무너져 내린다. 몸뚱이의 종기가 결코 환영받지 못할 고약함이듯, 길가의 칼리토토도 이래저래 칼리토토을 통과 못할 운명을 맞는 중이다.
비-위생의 간격이 사라지고 비위생이 되는 칼리토토.
더 이상의 재생산을 억압당한 칼리토토는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달궈진다.
허벅지 종기가 가렵다. 하지만 더 이상의 손길은 금지된다. 간지러움과의 접촉은 상처의 악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부는 내면을 터뜨려 탈출을 유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칼리토토 열매도 그러하다. 겉의 가려움에는 손길을 닿지 못하게 하면서도 말이다.
자신을 터뜨리는 것.
비칼리토토은 칼리토토으로 맞서 바라보지만, 비-칼리토토은 그러한 애매함이다. 그런 한낮의 보도 위에서는 칼리토토 열매와 내 허벅지의 종기가 일렬로 겹쳐진다. 칼리토토 열매가 내 종기 속으로 들어온 비-칼리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