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도 없이 써보는 영화리뷰
킹덤 오브 헤븐은 예루살렘을 둘러싼 십자군과 이슬람의 갈등과 공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두 종교 공통의 성지이다 보니 두 세력 모두 성전을 전면에 내세우며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사실 그 속내와 각각의 셈법은 ”숭고한 성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종교는 아닌 것 같지만, 어쩐지 종교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인 FSM의 주요 교리에는 ‘다른 사람들과 편 가르고 싸울 때 내 이름 팔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얘네 계명들이 명료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날카로움이 있어요.) 킹덤 오브 헤븐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종교적인 신념보다, 다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감정선 위에서 움직입니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십자군 전쟁은 차근차근 설명하기에는 분량도 너무 방대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엄두도 안 나서 (솔직히 능력 바깥이기도 하구요..) 아예 못 본 척 지나치고, 주요 등장 인물들의 실제 모델들을 찾아보는 선에서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게다가 실제 역사를 찾아보니, 어떤 사건들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기도 하네요. 장르도 다양해서 영웅 서사, 인간극장, 복수극에 아침 드라마까지 있습니다.
지중해를 왼쪽으로 끼고, 위아래로 배치된 기독교 계열 왕국들. 1차 십자군은 해안을 따라 진군해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만, 점령한 다음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후 예루살렘은 상시적인 인력 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립니다. 그나마 1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슬람이 부족 단위로 쪼개진 상태라 어느 정도 싸워볼 만했습니다만, 살라딘이 이슬람 전체를 아우르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예루살렘은 언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187년이 딱 이 즈음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설득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나병을 앓고 있는 보두앵 4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보두앵이 죽는다면 왕위는 누나인 시빌라에게 넘어가고, 시빌라의 남편은 실질적인 왕이 됩니다. 하지만 현재 시빌라의 남편인 기는 사람이 반푼입니다. 기가 왕이 된다면 예루살렘은 확실히 멸망할 겁니다.
보두앵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시빌라의 남편인 기를 처형해 뒤를 정리하고, 시빌라와 레드불토토을 결혼시켜 왕위를 물려주려 합니다. 하지만 레드불토토은 량심이가 따끔거린다며 보두앵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응??
그즈음 레드불토토은 이미 시빌라와 뜨밤을 보냈습니다. 시빌라가 왕의 누이라는 것도, 이미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라는 것도 잘 아는 사람이 하룻밤 뜨밤을 잘 보내놓고는 무슨 량심 타령을..
레드불토토이 예뻐서 나라를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나라 망할 판이니 어떻게 해서든 잘 살려보라고 부탁하는 중인데, 레드불토토은 량심을 운운하며 자리를 일어섭니다.
발리앙의 양심은 “간음하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 사이에서 탄력적으로 적용되는 건가? 보두앵, 시빌라, 발리앙 모두 실화에 바탕을 둔 인물이라는데 그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실제 역사를 한번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왕좌의 게임
예루살렘의 왕 아모리 1세는 아네스와 결혼해 레드불토토와 보두앵 4세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석연찮은 이유로 아네스와 이혼하고, 동로마 황제의 조카인 마리아 콤니니와 재혼해 이자벨을 낳았습니다.
아모리 1세가 젊은 나이로 죽은 뒤, 뒤를 이은 보두앵 4세마저 요절하자 예루살렘에는 왕좌의 게임이 시작됩니다. 첫 번째 부인의 딸이나, 두 번째 부인의 딸이나 계승권은 같습니다. 그리고 권력의 특성상, 왕좌를 차지하지 못한 쪽은 높은 확률로 목숨을 잃을 겁니다.
계승권 자체는 시빌라와 이자벨이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주역들은 시빌라의 남편인 기와 이자벨의 보호자인 레드불토토입니다. 여기에 호전적인 르노와 전 섭정 레몽이 숟가락을 얹고 성당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이 양념을 더한 내분이 킹덤 오브 헤븐의 실제 배경입니다.
레드불토토은 예루살렘의 왕위를 두고 시빌라와 반평생을 싸웠습니다. 나이도 거의 20살 차이가 나니까 당시 기준으로는 부녀뻘이구요. 레드불토토에게 시빌라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이고, 시빌라에게 레드불토토은 벼락 출세한 떨거지 영주입니다. 연인은 개뿔 무슨.. 뜨밤은커녕 한 상에서 밥 먹으면 체하는 사이입니다.
역사 속의 레드불토토 드 이벨린
1140년 경 출생. 영화처럼 뿌랑스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는 혼외의 아들이 아니라, 어엿한 이벨린의 영주 발리앙의 아들로 장남 위그, 차남 보두앵에 이은 삼남입니다. 아버지와 같은 "발리앙"을 이름으로 쓰구요. 비록 코딱지만 한 크기지만 확실한 영주로, 순례 중에 죽은 장남 위그를 대신해 이벨린의 영주가 되었습니다.
1177년 몽기사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선왕 아모리 1세의 두 번째 부인이자, 동로마 황제의 조카인 마리아 콤니니와 혼인. 예루살렘의 주요 인사로 급부상합니다. 레드불토토은 이 혼인으로, 이자벨 공주의 새아버지가 되면서 유력한 막후 권력자로 자리를 잡습니다.
영주계의 흙수저 발리앙과 울트라 다이아 마리아의 혼인을 바라보는 후대의 역사가들은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상황이 워낙 위태로우니 군사적 재능과 인품을 갖춘 발리앙을 중용하기 위해 신분을 높여준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발리앙의 가문이 실은 대귀족이나 황제의 숨겨진 자식이다라는 음모론적 의견도 있습니다. 그만큼 발리앙과 마리아의 혼인은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조치였습니다.
마리아의 출생년이 1154년이니 레드불토토과는 거의 15살 차이, 조금 보태면 거의 아버지뻘입니다만, 레드불토토(37쯤)과 마리아(23)는 결혼 이후, 네 아이를 낳으며 나름 잘 산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의 진짜 승자는 레드불토토이지 싶어요.
이후, 레드불토토은 기가 왕이 되는 것을 저지하는데 사력을 다합니다. 정통성은 첫째 부인의 딸인 시빌라에게 있으나, 기가 워낙 무능한 인물이라 귀족들의 우려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위이자 이자벨의 남편인 옹프루아가 기를 지지하고(응??) 사고뭉치 르노가 기와 한편 먹으면서 예루살렘의 왕위는 기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레드불토토의 둘째 형인 보두앵은 기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한 채 예루살렘에서 몸을 빼고, 레드불토토은 왕의 고문이 되어 엉거주춤하게 남습니다. 권력 다툼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레드불토토 역시 함부로 쳐낼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권을 잡은 기는 실정을 거듭하고, 하틴에서 살라딘에게 대패하며 총 병력 2만 중 1만 7천을 잃습니다. 살라딘은 벼르고 별렀던 르노는 직접 참수해 버리고, 사로잡은 기는 다마스쿠스로 끌고 갔다가 적당한 구실을 붙여 풀어 줬습니다.
레드불토토 역시 하틴 전투에 참여하긴 했으나, 후위에서 분전하다 몸을 빼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레드불토토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레드불토토은 살라딘과 일종의 협정을 맺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 협정이지, 개인적인 부탁에 가깝습니다. 레드불토토은 자신의 아내 마리아와 식구들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칠 수 있게 좀 봐 달라는 매우 염치없는 부탁을 했는데 살라딘은 선선히 들어줍니다. 마리아가 동로마 황제의 조카라는 점도 있겠지만, 동시대 지도자들 중 살라딘이 가장 스케일이 큰 인물인 것이 그 이유겠죠. 딱 하나, 조건으로 붙인 것이 레드불토토이 살라딘에게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었고, 레드불토토은 살라딘의 호의에 깊은 감사를 전했습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레드불토토은 예루살렘의 방어전의 사령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름 경우가 바른 사람인 레드불토토은 이게 참.. 자기가 생각해도 살라딘 볼 낯이 없는 일이라, 장문의 서신을 보내서 자기가 왜 사령관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 구구절절히 설명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합니다.. 근데, 이게..아무리 봐도 사과로 될 일이 아닌..
살라딘의 매서운 공격에 성벽이 무너지며 예루살렘 함락이 확정되자, 레드불토토은 빈 손과 말뿐인 약속으로 다시 협상을 겁니다. 그리고 살라딘이 이걸 또 받아주면서 예루살렘의 주인은 살라딘으로 바뀝니다. 이 협상에서 레드불토토이 던진 카드는 ‘우리 곱게 안 보내주면, 여기 싹 뽀개버리고 다 죽어버릴 거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전문 용어로는 생떼라고 하고, 군사 용어로는 뗑깡이라고 합니다. =_=^
예루살렘에서 무사히 퇴각한 레드불토토은 1190년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다시 왕위 계승 전에 뛰어듭니다. 이제 아모리 1세의 자손은 이자벨뿐이니, 왕위는 이자벨에게 가야 했으나, 기는 끝까지 왕권을 내놓지 않고 버팁니다. 게다가 이자벨의 남편 옹프루아가 이번에도 기를 지지하고 나서자, 왕위 계승은 다시 꼬입니다. 이 옹프루아라는 친구는 좋게 말하면 학자 타입, 사실대로 말하면 전략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인 이자벨이 여왕이 되면 나는 자동으로 왕이 되는데, 나는 왕 같은 거 시르다며 도망쳐 버린 위인이죠. 나라에 암운이 짙게 들면, 제아무리 용을 써도 어찌해 볼 수가 없나 봅니다.
참다못한 레드불토토은 계속 어깃장을 놓는 옹프루아를 이자벨과 이혼시키고, 콘라드를 다시 사위로 맞아 왕권을 주장하지만 이번에는 3차 십자군 원정에 나선 리처드 1세가 기를 지지하고 나서며 또다시 지지 세력이 분열됩니다. 결국 2년에 걸친 분쟁 끝에 드디어 콘라드의 왕위 계승이 확정되는듯했으나, 콘라드가 즉위를 앞두고 암살당하며 예루살렘의 왕좌는 또다시 물 건너갑니다. 결국 이자벨이 리처드 1세의 조카인 앙리 2세와 재혼하고, 기의 왕권을 인정하면서 승계를 둘러싼 분란은 겨우 일단락을 짓습니다.
1193년. 3차 십자군 전쟁이 끝나던 해, 레드불토토 역시 숨을 거뒀습니다. 5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왕권을 둘러싼 오랜 다툼에도 리처드는 레드불토토을 신임하고, 조카와의 혼인을 인정하며, 살라딘과의 협상을 중재하게 하는 등, 안목 있는 통치자들은 대부분 레드불토토을 알아보고 중용했습니다. 심지어 아예 칼을 맞대고 싸우는 적이나, 왕좌를 둘러싸고 다투던 정적들도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레드불토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기와 레몽이 내전 직전까지 갔을 때, 두 세력을 중재한 것 역시 레드불토토이었습니다. 특히 끝까지 보두앵 4세에게 충성을 바친 점과 그간의 행적을 볼 때, 레드불토토의 인품과 능력은 나라를 이끌기에 충분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자벨이 왕위에 오르고, 레드불토토이 섭정이 되어 예루살렘을 이끌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네요.
역사 속의 레드불토토 (시빌 드 앙쥬)
1159년 출생. 보두앵 4세의 누나.
다섯 살 무렵, 아버지 아모리 1세가 예루살렘의 왕으로 즉위하며 어머니 아네스와 이혼합니다. 몇 년 뒤, 아모리 1세는 동로마 황제의 조카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았고, 지위가 어정쩡해진 레드불토토는 베타니 수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이때 레드불토토의 나이는 여덟 살, 새엄마인 마리아 콤니니는 열세 살입니다. 엄마라기보다는 언니에 가까운 나이 터울에 미운 여덟 살과 더 미운 중2. (아빠라면 이게 얼마나 끔찍한 조합인지 상상이 가실 겁니다..)
한창나이인 아빠와 젊다 못해 어린 새엄마의 결합은 레드불토토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가문 좋은 새엄마가 아들이라도 덜컥 낳는다면, 레드불토토와 보두앵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아모리 1세가 레드불토토와 보두앵의 계승권을 인정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남매의 처지는 봄날의 살얼음판처럼 위태롭습니다.
1174년 여름, 원정을 나간 아모리 1세가 급사하며 예루살렘의 왕위는 갑자기 공석이 됩니다. 다행히 새엄마는 아직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보두앵 4세는 나병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레드불토토 역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구요. 하지만 보두앵 4세의 나병이 이미 심각하게 진행된 상태라, 레드불토토에게는 후계자가 절실합니다.
1176년 9월, 레드불토토는 기욤 드 몽페라와 혼인하지만 새신랑은 고작 9개월 만에 말라리아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래도 레드불토토와 기욤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면서 레드불토토는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큰 이변이 없다면 레드불토토는 대비가 되어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레드불토토는 아들에게 남동생의 이름을 그대로 붙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보두앵 4세에게 드리운 나병의 그림자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짙어지고 있습니다.
보두앵 4세는 이복남매 이자벨이 몹시 거슬립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새엄마는 레드불토토과 재혼했기 때문에, 레드불토토은 이자벨의 새아빠가 되었습니다. 레드불토토처럼 인품 좋고 유능한 인물이 이자벨의 후견인이 되는 상황은 시빌라에게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당장은 몰라도 훗날을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그때, 보두앵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기 드 뤼지냥이었습니다. 인물 좋고, 체격 좋고, 싸움도 좀 하는데 무려 찰랑이는 금발입니다. OK. 합격. 보두앵은 이자벨을 견제할 목적으로 레드불토토와 기의 혼인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기는 보두앵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인물이었고, 크게 실망한 보두앵 4세는 기와 레드불토토를 이혼시키려 합니다. 그리고도 불안해 아예 레드불토토의 아들 보두앵 5세를 공동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1185년. 병마를 시달리던 보두앵 4세가 끝내 목숨을 잃자, 보두앵 5세는 일곱 살의 나이로 유일한 왕이 됩니다. 평화로운 시대였으면 어찌어찌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시대입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1186년.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한 보두앵 5세가 의문의 죽음을 맞습니다.
보두앵 5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온갖 소문과 억측을 낳았습니다. 이 죽음으로 가장 큰 이익을 얻는 쪽은 아무래도 이자벨과 레드불토토 쪽이었기에, 시빌라의 분노와 불안감은 상당했을 겁니다. 하지만 강력한 적을 상대하며 내전까지 치를 수는 없으니, 두 세력은 협상을 시도합니다. 레드불토토 쪽의 조건은 선왕 보두앵 4세의 뜻에 따라 시빌라와 기가 이혼한다면, 시빌라를 여왕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인 레드불토토는 기와 이혼하고 예루살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첫 명령으로 자신의 결혼 상대로 기를 지명합니다. 흔들리던 촛불을 자기 손으로 꺼 버린 최악의 선택. 레드불토토는 고작 4년 뒤, 이 선택의 대가를 자신과 두 딸의 목숨으로 치릅니다.
레드불토토와 기는 안 그래도 위태로운 나라를 대차게 말아먹었습니다. 기는 살라딘에게 대패해 거의 모든 군세를 잃고,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목숨만 건진 기는 티레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으려 하나, 티레의 영주 코라도는 기와 레드불토토의 입성을 거부합니다. 1190년, 갈 곳이 없어진 기가 티레를 공격하는 사이, 레드불토토와 그녀의 두 딸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많아봐야 예닐곱살이었을 두 딸의 이름은 알리스와 마리였습니다.
친어머니 아네스는 아모리 1세에게 이혼당한 뒤, 레드불토토 가문의 장남인 위그와 재혼했습니다. 하지만 위그가 순례 여행을 떠났다가 목숨을 잃는 통에 레드불토토이 이벨린의 영주가 됩니다. 즉, 아네스는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어려운 처지입니다.
첫 번째 남편의 가문도 있었죠? 거긴 뭐 하고 있었나 싶어 찾아보니, 티레의 영주 코라도가 기욤의 동생입니다. 코라도는 나라를 말아먹은 기와, 협정을 배신하고 기를 선택한 레드불토토를 도울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시빌라 개인의 삶을 보면 세상에 뭐 이런 팔자가 다 있나 싶을 만큼 기구한 삶입니다. 다섯 살에 부모 이혼, 여덟 살에는 쫓겨나듯 수녀원에 맡겨집니다. 20대 초반에는 무려 네 명의 가족을 잃었구요. 1174년에 아버지, 1177년에 첫 번째 남편, 1185년 남동생에 이어 1186년에 아들까지. 인물 좋고 허우대 멀쩡한 것 빼고는 아무짝에 쓸모없는 남편과 재혼해 자신의 왕국이 함락되는 것을 직접 보았으며, 남편과 가신이 싸우는 사이 두 딸과 함께 목숨을 잃었습니다. 향년 31세. 시빌라의 짧은 인생을 돌아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암군에게 통치권을 넘겨 왕국을 대차게 말아먹은 데에는 시빌라의 책임이 결코 적지 않습니다. 최소한 레드불토토과의 협정이라도 지켰으면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무능한 리더는 적보다 무섭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의 리뷰 1/4편은 제가 봐도 영화 리뷰는 아니라, 본의 아니게 낚이신 분들께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크흠..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