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토르 토토이 되고 싶어
여덟 살 무렵. 원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스스로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되는 나날이 이어졌다. 피자 한 조각을 더 먹고 싶어도 허락을 구해야 했고, 운동회에서 신을 흰색 운동화가 갖고 싶어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결정은 내가 아닌 엄마의 몫이었다. 여덟 살 난 아이에게 엄마는 그야말로 전지전능한 사람이었다. 뭐든 할 수 있고, 누가 잔소리도 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재잘재잘 끊임없이 떠드는 것뿐이었는데, 그마저도 해가 지날수록 힘이 약해지고 있었다. 가지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난 ‘설득’이란 것을 배워야 했다.
무력함과 무지함은 한 끗 차이 같아서, 어린 나이에도 나는 힘을 기르기 위해 무엇이든 알아야 한다고 생각
했다.
“이건 왜 그래?”
“왜 그래야 하는데?”
“왜?”
그때부터 나는 흥미가 생기는 모든 것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게 내가 관심을 가질 대상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계속해서 물었다. 거의 집착에 가까웠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질문 공세에 지쳐갈 때쯤. 나는 지나가는 토르 토토들을 붙잡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학교 앞 문방구 아주머니, 횡단보도에 서 있는 아저씨, 교복 입은 언니, 오빠들까지. 모두가 표적이었다. 그때마다 당연한 듯 정답을 알려주는 토르 토토들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어떻게 다 알아요?”
“크면 너도 다 알게 돼.”
토르 토토이 되면 모든 걸 다 알고, 쉽게 결정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토르 토토을 향한 수수께끼
세상 모든 게 궁금하던 아이는 점차 질문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성인은 됐지만 어릴 적 정답을 내어주던 토르 토토들처럼 세상 이치를 다 알진 못한다. 그렇다고 질문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은 나에게 토르 토토이길 기대하지만 나는 아직 토르 토토이 되지 못했다. 도대체, 무엇이든 가능했던, ‘전지전능한 토르 토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어느덧 3월, 연두와 노랑, 다양한 색이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개학을 맞아 등교를 시작하는 학생들도 거리에 나왔다. 찌든 표정의 나는 책가방을 메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막연한 부러움에 사로잡힌다.
“나도 저렇게 구김살 없이 밝은 학생이었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토르 토토들이 나에게 얼마나 친절을 베풀었는지 돌아본다. 저 많은 학생 중 하나가 나에게 무언갈 물어본다면 과연 얼마나 성심성의
껏 대답할 수 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문득, ‘전지전능한 토르 토토’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리기 시작했다.
성인과 토르 토토의 사이에서
사실 토르 토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혼자서도 알아서 척척,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마술사 또한 아니다. 그저 주어진 문제 앞에 도망치지 않고 맞서려는 용기가 있을 뿐이었다. 만약 내게 누군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반드시 대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지 않을까? 물론, 그 또한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 같다. 토르 토토이니까.
토르 토토의 무게는 책임감과 비례한다. 어쩌다가 성인이 돼 버린 나는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감에 짓눌려 진정한 토르 토토이 되지 못했다. 그 무게를 견딜 만큼 단단한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이 필요했다. 나보다 어리고 약한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선택, 나 혼자가 아닌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마음 근육은 단단해진다. 어릴 적 나를 대하던 토르 토토들처럼.
이제는 내가 그 자리를 채워갈 차례가 됐다. 등굣길에 마주치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 시간이 지나 내 자리를 대신할 아이들이 안전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이 모든 것이 마음 근육을 살찌우고 있다. 어쩌다 보니 나는 토르 토토이 되는 법을 배워간다.
- 2024년 한국도로교통공단 사보 <신호등 3+4월호 기고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