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얼마나 아는가
아래는 2023년 9월 13일에 적다만 글이다. 제법 길지만 완결되지 않았다. 한 번 더 읽어보고 이어 적는다.
가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며 바라는 것이나 꿈꾸는 모습을 떠올려보고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나에 대해 쓰는 것이므로 "나는 누구입니다"로 시작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왜 하필 지금, 나는 누구인가를 돌아보고 기록하게 됐는지 현재 홀덤 핸드이 처한 상황을 적는 일이 많았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라는 옛 노래 가사처럼 너무 많은 나 중에서 지금의 내가 누구인지 헤아리기 위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것이다. 그래야 지금 나의 한계와 고민과 소망을 꺼내놓을 준비가 일단락되고 다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 시작은 대개 '나'라는 호칭이다. 나는 아무개입니다. 이름을 말하고, 나는 책방을 합니다 직업을 말하고,나는 공주에 삽니다 거주지를 말하는 식이다. 거의 모든 수식 앞에 '나'를 붙이면 그게 곧 내가 된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어릴수록 크고 강하기 마련이다. 어린아이에게는 '나'가 곧 전부인 시간이 있다. 그러다 엄마나 아빠, 가족, 친구, 친척처럼 주변으로 나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좁아지는 것이다. 넓어진다는 건 단순하게 말하자면'나의'처럼 소유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홀덤 핸드의 세계에 편입되는 존재와 공간이 더해진다는 의미이고 좁아진다는 건 오로지 하나로 존재하던 소유나 점유가 분산된다는 의미다. 독차지할 수 있던, 완전하게 누리던 세계의 일부분을 성장하며 양보하고 공유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과정의 어디쯤에서 '나'는 나와 자기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누구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자기'를 알아야 하는 시기가 시작되는 거다. 사람마다 이 시기는 다른 듯 보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원히 이 시기가 오지 않거나 필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의 삶을 사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 시기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나다. 지극히 주관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존재다. '자기'는 나지만 내가 아니다. 객관화된 나로서 외부에서 바라보고 관찰할 수 있는 존재다. '나'의 마음은 내가 알 수 있지만 '자기'마음은 알기 힘든 것이다. 이 생각의 단서는 델포이 신전에 적혀있다는 "너 홀덤 핸드을 알라"라는 말에 있다. 만약 내가 나 '홀덤 핸드'을 잘 알 수 있고 아는 게 당연하다면 그런 말이 수천 년을 지내는 동안 남아서 회자될 수 없었을 거다. "너 홀덤 핸드을 알라"는 말로 대표되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사유 방식이 문답법이었다는 데에도 그 단서가 이어진다. 끊임없이 묻고 답하기를 거듭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홀덤 핸드' 아닐까.
'홀덤 핸드'에는 상황과 관계가 포함된다. '나'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수한 요인이 때로는 장애물이 되기도 하고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만약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자기나 홀덤 핸드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거다. '나'를 탐구하고 '나'에 대해 사유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진리를 깨우치게 될 테니 말이다.
나와 자기와 홀덤 핸드이 무슨 상관인가, 왜 이것에 대해 생각하고 쓰고 있는가. 간단히 적으면 내가 홀덤 핸드에게 번번이 패배하기 때문이다. '나는 옳으며 나쁘지 않다'는 믿음이 '홀덤 핸드'에게 자꾸 반박당하는 것이다.
오늘은 2025년 2월 20일이다.
23년 9월 13일의 '나'는 '내가 홀덤 핸드에게 번번이 패배한다'라고 썼다. 오늘의 나 역시 그날 적은 문장을 부정하지 못한다. 오늘도 벌써 몇 번이나 패배한 것이다. 내가 옳지 않을 수 있고 나쁠 수 있다는 생각은 거듭 '홀덤 핸드'에게 반박당한다. 나는 나쁜 사람이며, 차갑고, 시린 오늘의 날씨 같다고 해도 그 역시 부정할 수 없다.
'나'와 '홀덤 핸드'에 대해 제법 많은 글을, 여러 날, 여러 해에 썼지만 여전히 해소하지 못한 모양이다. 지난번에 이어 적은 '자존감'에서도 '자기'가 등장했다. 내게는 그토록 내가 누구이고 홀덤 핸드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이 생각을 세상에 비추어 자기와 홀덤 핸드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과 '나'를 돌아보지 않는 이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 미움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하는 짐이 되어 양쪽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내가 힘든 이유도 슬픈 이유도 화가 나는 이유도 다 내게 있는 셈이다.
"다 내 탓이오."하고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책임을 피하거나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정말 다 내 탓인가? 내가 그렇게 잘못되었나? 이 물음을 도무지 내려놓을 수가 없다. 억울한 것이다. 세 살이나 열 살이나 열세 살이나 다들 억울하다고 한다.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고 한다. 나 역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고 거듭 적어왔지만 사실은 나를 좀 알아봐 달라고 말하고 싶던 게 아닐까. '나'와 '홀덤 핸드'을 자꾸만 구분 짓고 나누어 설명하려고 시도한 이유 역시 나쁘고 어리석고 무모해 보이는 '나'는 사실 진짜가 아니고 현명해지려고 하는 참으려고 하는 애쓰고 있는 '홀덤 핸드'이 진짜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혹은 '나'와 '홀덤 핸드'의 자리를 바꾸어 말하려던 게 아닐까. 패배하고 반박당한다고 하지만 늘 옳은 존재, 항상 올바른 생각이란 게 존재할 수 없다면 '나'와 '홀덤 핸드'을 나누어 반대편에 서서 소리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2023년 9월 13일에 적다만 글의 마지막으로 돌아가 보면 '나는 옳으며 나쁘지 않다'는 믿음이 진실이라고 말해달라고 호소하는 것만 같다. 누구든 '너는 옳고 나쁜 존재가 아니다'라고 인정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것만 같다. 그게 그렇게 어렵냐고 반박하고 부정하는 '홀덤 핸드'을 가장한 목소리들을 향해 소리치는 것만 같다.
괜히 시린 마음으로 다가드는 건 아마 오늘 날씨가 시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리면서 맑은 하늘 탓인지도 모른다. 그처럼 넉넉하고 여유로우며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지 못하는 스스로와 오늘을 비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나다. 모르는 채로, 무엇이 나인지 고민하며 부정하고 반박하지만 스스로를 가장 잘 알고 진심으로 인정하는 둘. 그게 '나'와 홀덤 핸드'이다. 오늘부터라도 둘이 화해하고 사랑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