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TV없는 삶
요즘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한 번쯤은 반드시 들어봤을 법한 단어, 책바오슬롯. 개인적으론 출판업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 싶어서 아기가 어릴 땐 딱히 책바오슬롯를 하겠노라고 다짐한 적은 없었다. 주변에선 돌도 되지 않은 아기에게 수백만 원 전집을 몇 질씩 사들였다 해도 그저 남의 일이었다.
아기가 점점 자라 인지능력이 생기면서 뭘 하며 놀아줄까 고민하다가, 하도 책바오슬롯, 책바오슬롯 하길래 검색을 해 봤더니 광고글을 제외하고는 놀랍게도 책바오슬롯의 정의 자체가 너무나 모호했다. 그냥 아기한테 책을 수시로 많이 읽어주고, 거기서 좀 더 노력한다 하면 책 내용과 연계해서 아이랑 다양하게 놀아주고, 가끔 체험도 하고 그러는 게 책바오슬롯였다.
그리고 그건 아기가 아주 어릴 때부터, 백일도 되기 전부터 내가 자연스레 하고 있던 거였다.
우리 부부의 첫 집이었던 미니 투룸에는 TV가 없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고 집이 너무 좁아서 TV를 걸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기왕이면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은데 이 집에서는 조그만 미니 TV밖엔 걸 수 없어서 차라리 나중에 좀 더 큰 집으로 이사를 간 뒤 마련하자 했다. 나는 애초에 TV를 아예 안 보고 사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코로나 시국에 바오슬롯랑 단 둘이 하루 종일을 보내려니 뭐라도 해야 했다. 그래서 선물받은 초점책을 시작으로 당근으로 저렴하게 사온 보드북 몇 개, 지역 도서관에서 바오슬롯 연령에 맞게 주는 북스타트 그림책, 공익재단에서 추첨을 통해 일 년간 무료로 제공해 주는 그림책 등(아쉽게도 이 프로그램은 얼마전 폐지됐다고 한다..)을 목이 터지도록 읽어줬다. 바오슬롯에게 책 읽어 주는 게 힘들다는 부모님도 계시지만 우리 아기는 당시 새벽 5시까지 밤을 새우기도 일쑤였던, 하루종일 내 품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아기였기에 책 읽어주기는 오히려 가장 쉬운 활동에 속했다. 그래서 만만한 게 책이라 주구장창 읽혔다.
그렇게 새로운 집으로 이사가서도 딱히 집이 크게 넓어지지도 않았고, 집에 TV를 걸면 나부터가 하루 종일 그것만 틀어놓고 바오슬롯랑 멍하니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아서 그냥 거실을 책장과 수납장으로 채웠다.
걸음마가 느렸던 우리 아이는 돌 무렵부터 서툰 걸음마로 벽을 붙잡고 비틀비틀 책장에서 책을 뽑아와 나에게 가져왔다. 아이에 따라선 책에 전혀 취미가 없는 경우도 있어 책바오슬롯가 안 먹히기도 한다는데 천만 다행히도 우리 아이는 나를 닮아선지 책을 좋아하는 쪽이었던 것이다.
복직 전 두 돌까지 가정보육을 하면서 긴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온갖 독후활동을 시도했다. 별 것은 아니고 책에 나오는 과일을 직접 만져보고 먹어보고, 책 부록에 실려 있는 연계 놀이 등을 직접 해본 정도였다. 혹은 자연관찰 책에서 본 동식물을 집근처 공원 등에서 직접 보면서 아기와 이야기를 나눴다. 당시 바오슬롯는 말이 늦게 트여서 나 혼자만의 이야기였지만, 아기도 나름대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책에서 본 것들을 반가운 기색으로 알아보기도 했다.
작정하고 책바오슬롯를 해야겠다고 한 적은 없었고, 그렇기에 책 또한 아이가 세 살 이후 유명 전집 몇 질을 들였던 걸 제외하면 대부분 당근마켓 등으로 저렴하게 구입하거나 무료나눔을 받아온 정도였다. 국내외 유명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집을 꿰고 있는 책바오슬롯 전문가 엄마들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아이는 많지 않은 책을 읽고 또 읽고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반복해 보면서 몰입했다.(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한 책은 바로 호비 시리즈였다. 돌 때부터 네 돌 전까지 주구장창 봤다) 코로나로 격리생활 중에는 목이 완전히 맛이 간 상태로 온 가족이 감금생활을 하며 아이가 읽어달란 책을 남편과 번갈아 읽으며 죽을 뻔 했다. 정말로 목에서 피 날 뻔 했다.
이렇게 두서없고 대중없는 책바오슬롯(?)임에도 아이는 여섯 살이 된 현재까지 책을 좋아하고 꽤나 즐겨 본다. 특히 좋아하는 기계와 과학에 관한 책을 더 선호하지만 그 외의 내용도 편견없이 즐겨 읽는 편이다. 영어노출을 하고 나서부터는 영어 그림책도 재미있게 보고 있다.
가장 좋은 점은 바오슬롯가 '놀 줄 아는 바오슬롯'가 됐다는 점이다. 예전 블로그 체험단으로 갔던 유아 기질 테스트에서도 담당 선생님이 바오슬롯의 어휘수준과 놀이 능력이 또래 대비 탁월하다고 칭찬하신 바 있다. 사회성은 물론이고 집 안에서도 혼자 갖가지 장난감과 사물들을 동원해서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고 스토리텔링하며 노는 데 도가 텄다. 심심할 틈이 없으니 영상을 딱히 찾지도 않는다.
(덕분에 이 글도 바오슬롯가 혼자서 잘 노는 동안 쓰고 있다)
우리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기질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TV가 없는 만큼 심심한 시간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내 어릴 때를 돌아봐도 나 역시 어린 시절 상당한 활자중독이었다. 심지어 새 학기 교과서를 받아 오면 그것도 다 미리 읽었다(물론 학교 성적과는 별개였다...) 하지만 중학교 무렵 집 PC에 인터넷 망이 깔리고, 클릭 한 번으로 무한의 세계가 펼쳐지는 그곳으로 나의 독서광 생활은 막을 내리게 됐다. 책을 읽기에 인터넷은 너무나 재미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요즘, TV나 웹보다 더한 강적이라 할 수 있는 모바일, 유튜브, 쇼츠 등이 주는 강한 도파민의 쾌감은 책 따위는 아예 잊게 하기에 충분하다. 대중교통을 타도 이제는 연령대를 불문하고 손에 책이나 신문을 든 사람은 찾기가 어렵다. 우리 바오슬롯 또래의 미취학 아동들도 부모님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온갖 영상과 게임에 여과없이 빠져있는 모습을 너무 자주 본다.
책바오슬롯라는 단어가 너무 흔한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책바오슬롯를 하기 가장 어려운 시대기도 하다. 너무나 재밌는 게 많기에 책 따위에는 손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바오슬롯를 하겠다고 딱히 마음먹지 않았던 나도 단지 아이에게 영상 노출을 최소화했기 때문에 얼떨결에 책바오슬롯에 성공(?)하게 된 것 같다. 각잡고 하는 책바오슬롯 방법론보다 책을 볼 수밖에 없는, 심심한 상황을 만들어 주는 것이 먼저일지 모른다.
책바오슬롯를 하면 공부를 잘 할까, 아무래도 책바오슬롯라는 방법론이 널리 유통된 이유는 수많은 명문대 합격생 부모님들의 수기에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혔다는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론 학구적 기질이 책을 좋아하게 돼서 공부도 잘 한 건지, 책을 많이 읽어서 공부를 잘 한 건지는 알기 어렵다고 본다. 우리 아이의 경우에도 딱히 인지적으로 영재성을 보인다고 보긴 어렵다. 그냥 다섯 살 때부터 별다른 사교육 없이 쉬운 한글을 읽기 시작했고, 여섯 살인 올해부터는 (공부방 다닌 지 두 달 됐지만) 왠만한 글자는 줄줄 읽기 시작해서 언젠가는 읽기 독립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내 성대도 조금은 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정도다.
오히려 내가 책에 기대하는 부분은보다 본질적인 영역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활자중독 수준으로 섭렵했던 다양한 책을 통해 시야를 넓혔고 사유하는 힘을 길렀다. 특히 요즘처럼 온라인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마구 범람하는 시대에는, 이러한 힘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어떠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수동적으로 끌려다니지 않고 스스로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능력. 단말마의 도파민 중독성만을 좇지 않고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결국 올드 미디어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