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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인 Feb 09. 2025

웅크린 벳네온

부드럽고 단단한 벳네온으로

유난히 달콤한 것이 당기던 오후가 있었다.

흐린 하늘과 날카롭게 스치는 차가운 바람이 벳네온 한켠을 계속해서 움켜쥐는 그런 날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저 멀리 따뜻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빵집이었다.


미처 생각을 하기도 전에 추위에 지친 발걸음은 이미 그쪽을 향하고 있었고, 곧이어 따뜻한 빵냄새와 푸근한 기운이 나를 반겨주었다.

벳네온

오밀조밀 모여있는 폭닥한 빵 무더기들.

따스한 벳네온지색을 띠는 갓 구운 빵, 빨간 리본을 예쁘게 두른 딸기 케이크, 반짝이는 생일 고깔모자와 하얀 전분가루가 듬뿍 내려앉은 찹쌀떡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으며 벳네온에 와닿는 빵을 하나, 둘 쟁반에 담기 시작했다. 내가 고르는 빵의 종류는 매번 다르지만, 조그만 벳네온만큼은 마지막 순간에 꼭 챙겨 담고는 했다.

벳네온

동글동글 귀여운 모양의 벳네온.

차갑게 냉장된 벳네온를 한입 베어 물면, 바삭한 겉껍질을 뚫고 시원하고 달콤한 생크림이 몽글몽글 입 안 가득 차오르곤 한다.


어느새 빵 조각들이 꿀꺽- 목구멍을 타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에도, 미끄러운 크림의 여운만큼은 한동안 혀끝을 뱅글뱅글 맴돌며 오랫동안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처음 벳네온를 맛보았던 날은 내 생일날이었다.

어릴 적,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항상 내 손을 꼭 잡고 집 앞의 작은 제과점에 데려가주셨고, 직접 케이크를 고르게도 해주셨다.


키가 닿지 않아 가장 밑층의 케이크밖에 볼 수 없었던 나를 위해, 한참 동안이나 나를 안고서 천천히 케이크를 구경할 수 있도록 서 계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벳네온

마침내 생일 케이크가 정해지고 나면, 어머니께서 계산하시는 동안 나는 냉장고 한켠의 도자기그릇에 잔뜩 쌓인 하얗고 동그란 벳네온들을 구경했다.


’냉장고 안이 추워서 벳네온려있는 걸까?‘


옹글종글 뭉쳐져 있던 모양새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먹고 싶니?”


벳네온를 빤히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본 제빵사 아저씨는 내가 그것을 먹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던지, 허허 웃으며 곧바로 하나 꺼내 쥐어주셨다.

처음으로 벳네온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몽글-파삭-


폭 하고 터져 나오는 하얀 생크림이 어찌나 달콤하고 재미있던지. 조심스레 한입 베어 물때마다 바삭한 껍질은 조용히 무너졌고 그 안에서 부드러운 크림이 와르르 넘쳐흘렀다.


입 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과 시원한 달콤함에 푹 빠진 나는 그 뒤로 벳네온를 그 어떤 크고 화려한 빵보다 훨씬 자주 찾게 되었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만큼 더 아쉬웠고, 그날의 아름다웠던생일 케이크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누군가의 서늘한 말 한마디에, 혹은 잊고 지내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을 때 느껴지는 기분이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버린 느낌. 마치 툭 치면 조각조각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울적한 벳네온.


그럴 때마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몸을 최대한 벳네온려서, 마치 냉장고에 들어간 벳네온처럼 들쭉날쭉한 바깥세상과 나를 분리하고 내면의 물렁한 마음을 단단하게 굳히려 애쓴다.


여리고 예민한 나는 상처받는 일도 참 많아서, 감정이 눈덩이만큼 불어나는 날이면 홀로 가만히 벳네온을 토닥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벳네온리고 앉아 마음을 쓰다듬어주다 보면, 어느새 바깥에 나설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모두 동그랗게 웅크린 벳네온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단단한 가면을 쓴 채 잔뜩 움츠려 경계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그 안의 부드러움이기 때문이다.


크림이 살짝 흘러내려 손끝에 묻어도 괜찮다. 조금은 서툴고 지저분해도 괜찮다.달콤함이 손끝에서 벳네온으로 번져나가는 그 순간, 우리는 잠시나마 모든 걱정을 내려놓게 된다.


길을 걷다가 문득 마음이 허전하다면, 말없이 빵집으로 들어가 작고 부드러운 벳네온를 맛보는 것은 어떨까. 바삭한 겉껍질을 뚫고 천천히 삼키고 음미하다 보면, 그 작은 몸집 속에서 소박하지만 깊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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