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캐리비안 스터드 말은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겨우내 몸을 움츠리고 있던 만물이 일제히 일어서는 모습을 '본다'라는 것에서 그 근원을 말한다고도 한다. 이는 짙은 회갈색으로 물든 사방이 깨어나 연록으로 물드는 세상을 만나는 단순한 변화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차이를 말한다면 우리가 닿는 세계는 여기에서 저기로 살짝 바뀐 것뿐이다.
하지만 새 삶이캐리비안 스터드 대단한 생명현상을 대면하면 실로 경이로운 것이다. 매섭게 얼어붙어 납작 엎드린 삶이 그 완강함을 뚫고 부드러움과 포근함으로 맞서니 말이다. 심지어 물 한 방울 없는 단단한 바위 위에서도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생명이 우뚝 선다니!
자연은 그냥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이 보기엔 부캐리비안 스터드스럽게 보이는 것에서도 서로는 잘 어울려 조합을 이룬다. 그래서 선현들은 돌의 단단함과 풀 또는 나무의 유연함이 한 데 어울리는 모습에 세상사를 빗대곤 했다. 말하자면, 내면은 암석처럼 단단하지만 겉은 바람에 하늘거리는 풀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부드러움을 품는 것에 찬사를 보낸 것이다. 더 나아가 보면, 그 위에 얹힌 식물이 바위덩이보다 나약한 것은 아니다.
농담 삼아하던 말이 있다.
'신체 부위 중에 가장 강한 것은 머리칼캐리비안 스터드고!'
왜냐하면 돌을(?) 뚫고 나왔으니까!
암튼 이런 부캐리비안 스터드의 캐리비안 스터드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에 별이 떠 있고, 땡벌에 쏘이는 캐리비안 스터드, 호랑이 이빨에 물린 것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인 것처럼, 자연은 제 나름 적응하는 방법을 암호같이 풀어놓았다. 그런데 그것은 실상 비밀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에 애써 눈길을 주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그런 대립적인 요소를 일부러 부정적으로 조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익히 인정캐리비안 스터드 것처럼, 인간이란 아무리 건방을 떨어봐도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서로가 반목하고 모순적으로 행동캐리비안 스터드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어느 하나로 통합하려는 몸짓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만약 나무뿌리 주변에 잡초가 자라지 않는다면 그 나무는 온도 조절 등에 실패해 생존하기 힘들다.
또 그 풀은 벌레 따위를 수용하지 않으면 뭔지 모르지만 필요한 것을 얻기가 힘들 캐리비안 스터드. 이런 상호 작용은 폴이 땅의 영양분을 심하게 뺏어간다든지, 곤충이 지나치게 풀잎을 갉아먹는다든지 하는 과도함만 없다면 서로는 이유 있는 의존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들에겐 욕망이캐리비안 스터드 불가능성으로 작동해 주변을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한 욕망을 절제하더라도,
이번엔 진정성이란 문제에 부딪힌다. 회의적 입장으로 보면 타인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캐리비안 스터드 비아냥마저 따르게 된다. 물론 자연선택도 이런 개체 보존 본능이 복합적으로 작동하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인 탓에 그것에 의도를 담는다는 것이다. 이 모두를 '의지'캐리비안 스터드 것으로 환원하면 사실은 인간이든 다른 유적 존재이든 별 구별할 것은 없어 보인다. 돌 위에 얹힌 이끼를 바위가
수용하든 밀쳐내든 하는 것도 의지라는 개념으로 말하면, 세계는 결국 이해타산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의 '생각함'이라는 것이 개입하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말하자면 그럴 수 있는 것임에도 오로지 부정적으로 배척하는 폭력이 작동하는 것이다. 심지어 서로에게 좋은 것으로 작용하는 것임에도 적대적으로 배제한다. 분명 불완전한 존재임에도 그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강압적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 불완전함을 보충하기라도 하는 듯 대신 신비로운 대상을 집어넣기도 한다.
그리고는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 익숙하지 않은 것은 무질서, 부캐리비안 스터드로 재단한다. 이런 환상이 근본적으로는 상상력의 폭력이 작동했음을 느끼게 한다. 물론 지나친 현실주의는 문제가 많다. 인간의 타자에 대한 구별책으로서 고결한 인간성을 상정하는 것 마저 무시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마저 폐기하는 꼴이 될 것이다. 문제는 상상력의 과잉이다. 인간은 이렇게 되어야 맞다는 것이 있을까?
다만 '사람을 살인하는 것은 부도덕하다'캐리비안 스터드 것 같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통 관념 말고는 말이다.
그래서 불완전한 인간이 불완전한 사태에 맞설 때는 상호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캐리비안 스터드 인간 본래의 모습이기는 하다.
하지만, 자연에서는 필요에 의해서든 우연적 현상이든 서로 강압적으로 밀쳐내지는 않는다. 바람에 날려 우연히 흙 담 틈에 끼어든 민들레 홀씨를 담벼락은 배척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뽑아내는 존재는 벽에 틈이 생길 것을 우려하는 인간이다. 물론 벽에 구멍이 생겨 구조물을 무너뜨리게 두고 볼 수만은 없다. 또 거기에 모여드는 성가신 벌레를 방치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런 발본색원은 무수한 가능성을 제거하는 캐리비안 스터드.
'민들레, 벌, 벌꿀, 맛있는 식재료....'
그것보다 더 큰 생산성을 기준으로 이해타산이 가능한 존재가 인간캐리비안 스터드지만, 그만큼 자연의 의지는 꺾이게 된다.
세상은 늘 시끄럽다. 불쑥 제 주변을 둘러보면 하루라도 조용힌 날은 없다. 심지어 기쁜 일만 가득하더라도 누군가에겐 분명 소음이다. 세상 주변이 침묵에 잠겨있는 순간에도 그 속에서는 마주 서는 입장이
부딪히고 있다.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상은 좀처럼 중간점에서 만나 초월적 태도로 지양되는 일이 드물다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하다면 상호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그것은 불완전함을 생전제하면 지극히 자연스러우며 서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가 자연을 닮는다고 한다면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연에서 점점 더 멀어져 어느 한쪽의 극단으로만 치우친다.
봄이캐리비안 스터드 새 삶의 계기를 우리는 왜 즐겁고 가슴 서레는 기대로 노래할까?
해묵은 생각과 부딪힘을 뚫고 온 세상이 캐리비안 스터드롭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을 반기기 때문일 것이다. 양쪽이 다 옳다거나 모두가 그르다는 것은 참 애매한 태도이다. 그것은 오히려 양자의 옳고 그름을 은폐하는 모호함이다. 하지만 도덕적, 정치적 태도 등을 벗어나면 인간에게는 이런 양단의 대척이 지양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돌 위에 얹힌 이끼, 풀잎 위 벌레 같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인간이 마음속 제2의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사만 지배하게 된다. 우리 몸 위로는 이끼가 자라고 폴이 하늘거릴 여지가 날이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봄은 다시 우리를 찾는다.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달라질 것 없는 세상에 그 계절은 무관심하게 되찾아 오는 것이다. 수천, 수만 년 동안 인간에게 그 교훈을 전하고자 매번 반복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되풀이로만 받아들인다. 이번 봄은 그 같은 무감각을 떨쳐내고 봄이라는 캐리비안 스터드를 맞이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