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 호일과 정상파라오 슬롯
"이건 이별 파라오 슬롯가 확실해"
"무슨 소리야. 이만큼 따듯한 사랑파라오 슬롯가 어딨어. 결혼식 축가로 부르면 딱일 것 같은데..."
"결혼식 축가? 미쳤어?"
취기가 적당히 오른 친구와 함께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소한 언쟁이 벌어졌다. 검정치마의 '나랑 아니면'이란 곡은사랑을 파라오 슬롯하고 있는 걸까 이별을 파라오 슬롯하고 있는 걸까. 내가 느끼는 바는 이랬다. 느린 BPM 위에 잔잔히 진동하는현악기,늘어지는 듯한 보컬은 이별한 뒤 헤어진 연인을 회상하는 듯한 분위기를 완벽히 조성했다. 그 분위기 속 '나랑 아니면 누구랑 사랑할 수 있겠니'라는 가사는 떠나간 연인을 홀로 원망하는 남자의 외침이 틀림없었다. 이 곡을처음 접한 순간부터단 한 번도 사랑을 파라오 슬롯한다고 느낀 적은 없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친구의 생각은 정확히 반대였다. 느릿하게 연주되는 악기들이 연인 간의 편안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했고, 가사들을 하나하나 읽어주며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곡이 당연하다며 반박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한참 침을 튀기던 중친구는 승리를 확신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내가 맞잖아! 조휴일(검정치마)이이 앨범에 담긴 모든 곡은 사랑 파라오 슬롯래!"
완패였다. 지금껏 그저 곡의 분위기만을 내세운 내 조촐한 증거로는 그의 주장을 무너뜨릴 방법이 없었다. 아티스트가 직접 밝힌 앨범 소개는 친구의 주장을 철통같이 방어해주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벙어리가 되어버렸지만, 마음속으로 '그래도 나에겐 이별 파라오 슬롯야'라며 속으로만되뇌었다.
천문학의 역사에는 완벽한 반박의 증거와 함께 사라진 이론들이 꽤나 많다. 배를 타고 앞으로만 가다 보면 언젠간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이라던 지구 평평설, 온 파라오 슬롯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정상 파라오 슬롯론'이 있다.
1929년, 허블은 기가 막힌 발견으로 천문학계를 뒤흔들었다. 그의 관측에 의하면 파라오 슬롯는 팽창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몇 분의 순간에도 파라오 슬롯는 부지런하게 커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명백한 관측자료 덕분에 파라오 슬롯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전 세계에 퍼졌고, 이는 천문학자들에게 또 다른 의문을 심어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파라오 슬롯의 옛 모습은 어땠을까?'
머지않아 파라오 슬롯의 성장 과정을 설명한 두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이론은 같은 해인 1948년에 세상에 발표되었다. 첫 번째는파라오 슬롯가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은, 작은상태에서부터 시작해 팽창을해왔다는 이론이다. 후에 이 이론은 '빅뱅 이론'이라는 멋진 이름을 갖게 된다. 빅뱅 이론을 주장한 천문학자 가모프는팽창하고 있는 파라오 슬롯의 시간을 거꾸로 돌려 작은 파라오 슬롯를 상상했다. 그 작은 파라오 슬롯에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모여있어 아주 뜨거웠고, 이후 지금까지 팽창하고 식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파라오 슬롯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론은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에 의해 등장한 정상 파라오 슬롯론이다.호일은파라오 슬롯가 항상 일정한 상태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파라오 슬롯는 팽창하고 있지만, 팽창하며 생긴 빈 공간에새로운 물질이 끊임없이 생성되어파라오 슬롯의 크기와 밀도는 항상 일정하게 유지된다는 이론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파라오 슬롯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일은 완벽히 패배했다. 비슷해 보였던 양측 진영이었지만, 빅뱅 파라오 슬롯론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하나 둘 발견되어 가모프의 파라오 슬롯론을 성벽처럼 감쌌다. 작고 뜨거웠던 파라오 슬롯에서부터 먼 여행을 떠나온 에너지가 포착되었고, 과거의 파라오 슬롯는 지금과 달랐다는 관측 결과들이 정상 파라오 슬롯론의 입지를 조여왔다. 이러한 증거들은 결국 가모프의 손을 들어주었다. 더 이상 호일의 파라오 슬롯가 파고들 틈은 없어 보였고 결국 정상 파라오 슬롯론은 차갑게 식어가며 사람들에게서 잊혀져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일은 2001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본인이 쥔 생각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빅뱅 파라오 슬롯론의 증거들은 점점 늘어만 갔지만끝까지 정상 파라오 슬롯론을 내세우며 반박했다.
아직도 나에게 검정치마의 '나랑 아니면'은이별 파라오 슬롯다. 앨범 소개에 적힌 원작자의 분명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곡을 들을 때면 이별한 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듯한 감정이 스며든다. 물론 음악이라는 예술품을 어떻게 감상하는지는 개인의 몫이지만, 확실한 증거에도 내 마음은 조금도 꺾이질 않는다. 과학을대하는 자세가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같을 순 없다. 하지만빅뱅 파라오 슬롯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이 하나 둘 발견되었을 때 호일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본인이 생각하는 파라오 슬롯가 부정당하는 느낌은 어땠을까. 친구의 완벽한 주장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내 감상을 유지하는 내 마음과도 같았을까. 어릴 적부터 빅뱅 파라오 슬롯론을 배우며 정상 파라오 슬롯론은 틀린 이론이라 여겨왔지만 이번만큼은 호일에게도 조금은 공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