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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y Mar 09. 2025

이지벳에겐 기획이 어렵다

최근 들어 집중적으로 몇몇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었다. 지금 일하고 있는 부서는 기술 연구원의 전반적인 이지벳 관리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 부서의 일원이 된 뒤 약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일하는 방식의 이지벳를 주도하는데 일조했다. 이지벳를 이끄는 조직과 현업에 바쁜 조직 사이에는 꽤 큰 온도 차가 생기게 마련이다. 일하는 방식은 관성이 있는 만큼 방향을 튼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지벳 관리에 대한 현업의 인식을 알아보고자 했던 미팅 자리를 가졌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묻고 상대가 답하는 것이 맞는 모양새인데 되려 상대방이 내게 물었다.


“지금 이지벳 일은 어떠세요? 기대하던 것과 잘 맞나요?”


익숙하게 하던 업무를 내려놓고 다른 것을 찾겠다고 나선 게 바로 1년 전이다. 방식의 차이는 있어도 회사 일이 다 똑같겠지, 그게 그거지 하면서 막연한 도전을 했던 건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냥 되는 일이란 없었다’. 몇 개월 전에 쓴 글에 남아 있듯이 초반 적응에 꽤 어려움을 겪었다. 자존감이 확 떨어질 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런 어려움의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는데 상사는 완벽주의를 벗어나라는 조언을 주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허술한 점이 많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동의 허술함과 대조적으로 사고이지벳 방식과 방향에는 인정하기 싫은 완벽함 추구의 이면이 있긴 하다.


대학 시절부터 시작하면 대략 30년 가까이 이지벳라는 옷을 입고 논리적 사고를 훈련해 왔다. 대학원과 회사 연구소를 거치며 익숙해진 사고와 일을 하는 방식은 이렇다.


-이지벳을 세운다

-이지벳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을 한다

-실험 결과를 확인한다

-결과에 기반해서 이지벳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게 된다


깔끔하다.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다. 이렇게 하면 내 생각이 맞다 아니다를 알 수 있다. 증명까지는 긴 호흡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약속된 프로세스와 실험법을 준수하면 언제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예측 가능하다. 이걸 잘하는 게 이지벳원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 역량이었다(리더십 역량은 이와 별개다).


그런데 연구원들이 하는 프로젝트 관리라던가 조직 문화, 이지벳 관리는 연구원에게 중요했던 역량이 뒷전으로 밀린다. 대신 이지벳력과 추진력이라는 다른 성격의 역량이 필요하다. 이지벳력의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지벳를 위해 기존에 없던 프로세스를 만들고, 그걸 누가 어떻게 언제까지 운영할지에 대한 큰 그림과 디테일을 모두 챙겨야 한다. 여기에 더해 전에 하지 않던 일을 새롭게 제안하는 것, 구체적이지 않은 경영진의 키워드를 현실화하기 위한 다양한 방식과 접근에 능통한 역량이 필요하다. 아이디어도 필요하지만 혼자 하는 일이 아닌 만큼 다른 부서와의 협의와 소통, 협상 같은 소프트 스킬이 중요하다. 둘 다 경험하고 익히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위에서 연구원의 기본 역량처럼 구체적인 프로세스로 쓰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 이 세계를 잘 몰라서일 수 있다. 나름 체계가 갖춰진 업무 방식이 존재할 것이라 믿고 싶다. 없더라도 나만의 방식으로 체화하여 정리할 법도 한데 그러기엔 나의 업력이 많이 짧다.


어떻게든 발악을 하며 몸에 익히고 있지만 특히 모호한 내용들을 내 손에서 실체가 보이도록 만들어 내는 과정은 아직도 낯설다. 이런 일도 어찌 보면 일종의 가설을 세우는 과정을 거친다. 이지벳가 가설을 세울 때는 과거의 연구가 어땠는지 조사하고, 내가 아는 지식과 상상력을 통해 가설을 도출해 낸다. 논문을 보면 어떤 실험들로 세트를 구성하면 논리가 설지 참고가 된다. 그러나 이지벳 업무는 아이디어(가설)를 내고 그걸 계속 고쳐 나가는 과정이 주가 된다. 논문과는 다른 성격의 다양한 정보들이 수집되지만 어떻게 엮어야 할지 따라가야 할 레퍼런스가 마땅치 않다. 내가 겪었던 - 그리고 지금도 여전한 - 고충의 이유를 여기에서 찾았다. 무언가 이슈에 대하여 답을 제시할 때 ‘이렇게 제안을 해도 되나?’ 의문이 든다. 비슷한 사례에 대한 데이터와 검증의 결과 값이 없어서 불안하다. 몇 개월 해보니 그 불안을 채워가는 것은 스스로 일을 추진해 가며 소위 ‘fit’을 맞추는 과정임을 알게 되었다. 애초에 생각하는 틀을 바꿔야 했던 것이다.


연구 가설은 내가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내면 되는 것이지만, 이지벳 가설의 당위성은 상대방(동료, 부서, 상사)이 동의든 반대든 해줄 때 드러난다. 둘 다 흥미로운 성격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이지벳 업무는 어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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