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1회 브런치에 글을 올리겠다는 나름의 글루틴 규칙을 어겼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생각의 파편들을 붙들어 온전한 글로 완성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매번 읽을만한 글로 완성을 짓는 일은 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늘 도달하기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이번엔 양상이 달랐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약속은 지키는 나지만, 한 달 전부터 잡혀있던 지인과의 일요일 북한산 산행도 양해를 구해 취소했다. 지금은 내 안에서 들끓는 생각들을 먼저 다스려야 했다.
무엇이 나를 노트북을 켜고 글을 써야 할 흰 바탕을 마주하기를 주저하게 하는가. 그것은 두려움이었을 지도, 분개였을지도 모른다.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평온한 일상이 일시에 어그러질 수 있다는 불안. 그것이 차분히 마음을 다스려 활자화하려는 마음을 무시로 방해한 정체이지 않을까.
12월 3일 밤. 마른하늘에서떨어진 날벼락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TV로 생중계되는 거짓말 같은 현실은 내 안의 예닐곱어린아이를 가장 먼저 끌어내어 두려움에 벌벌 떨게 했다.
1980년 5월,어린아이에겐 도무지 재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TV 뉴스가 눈에 들어왔던건, 화면에 가득한 무장군인들의 모습에서느껴지는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뉴스 아나운서의입에서 흘러나온 멘트들은 어린아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그럼에도,다급하고 비장하게전달하는그의 말들 속에 도드라지는 '폭도'라는 말과무장 군인들의 화면 속 모습은 어린아이에게도 전달되는 직관적인 공포였다.
반복해여러 번 본장면이 아니었는데도,그것은상당히 오랫동안 내장기 기억에 머물렀다. 그것이44년의 긴 세월을 흘러 다시 반복 재생될 수 있는 일이라고,어찌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단 몇 시간 만에 40여 년의 시간을 오간 밤을 보내고, 다음날 학교로 출근하니 우리 반 초등 1학년 아이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차례차례 자리를 채웠다. 전날과 하나 다를 바 없는 무구한 눈망울로. 이 아이들은어젯밤그 시간에모두 꿈나라에 들었었겠지.어떤 천진한 꿈들을 꾸고 있었을까.
이 아이들에게 오늘이 어제와 다른 날이 됐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여전히 아무때나 까르르 웃어대고, 벌떼처럼 웅웅 떠온라인바카라, 호시탐탐 장난칠 구멍을 찾는 아이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이 날, 내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아이를 달래 주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혼돈의 시간이 흐르는 이 시기가학교에선학기말 업무로 가장 바쁘다는 건 어쩌면 다행인가. 위태로운 국가적 위기에도 '가만히 있으라'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에 눈을 감고 입을 막고 마음을 닫는다. 아이들과 그날의 일과를 충실히 해내고 조용히 책을 읽고 필사를 하며 마음을 달래는 글귀로 캘리를 쓰며. 이게 옳은 일인가. 미래 세대를 길러내는 자의 올바른 자질인가.
지난 주말, 고교 시절을 마감한 딸이 아빠와 국회 앞에 다녀왔다. 아이가 쏟아놓은 후일담이 그저 흘러가는 말이 되지 않길 바랐다. 아이에게 "네가 맞이할 20대를 기록으로 남겨 보면 어떠냐"고 권했다. 언제나처럼 딸은 엄마의 말을 그저 흘려듣는 듯했다.
아직은 미성년자 신분을 다 떨쳐내지 못한 딸이 지원할 수 있었던 첫 아르바이트-쿠팡 소분 작업이라 했다-에 다녀온 날, 손목이 나갈 것 같았다던 자신의 노동의 대가가 고작 몇 만 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딸의 마음을움직였던걸까.자신의 노동의 가치에 각성했기에 딸은 첫 글을완성할수 있었으리라.
미래는 이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이다. 이들이 만들어 가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협하는 어떠한 폭력에도 '가만히 있지'않는 딸의 세대를 응원한다.
드디어 수능이 끝났다. 12년을 준비했던 시험이 이렇게 끝났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하기도 하지만, 역시 가장 큰 건 해방감이다. 대학 입시가 끝나는 것만큼 10대 인생에 큰 사건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했는데, 그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갑작스러운 '계엄령' 선포
수능이 끝난 후 설렘과 긴장으로 첫 아르바이트(쿠팡 소분 작업이었다)를 했던 날. 그날 저녁, 나는 첫 아르바이트 경험을 나누며 친구와 편하게 온라인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잠깐 화장실에 가려고 방에서 나왔는데, 엄마와 아빠가 늦은 시각까지 뉴스를 보고 계셨다. 평소라면 주무실 시간이었기에 의아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넘겼다.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던 탓에 부모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요즘엔 두 분이 함께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땐 의식적으로 자리를 피하게 된다. 내 대입 문제 관련인가 싶어서다.
그때 알람을 꺼놓았던 친구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문자가 가득 차있는 걸 봤다. 수많은 메시지들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떤 상황인지 알았다. 단톡방에서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언'을 확인한 나는 그때서야 엄마, 아빠가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뉴스에서는 국회 앞에 가득 찬 시민들과 군인들의 위태로운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 장면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장면이 정말 2024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3일 저녁 서울역 TV에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다. 2024.12.3 ⓒ 연합뉴스관련사진보기
나 같은 10대도 수업 시간에 광주 계엄 사태를 충분히 교육받아 계엄령이 얼마나 중대한 일인지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평범한 날에 갑작스럽게 계엄령이 터질 수 있단 말인가.
친구들 단체 카톡방에 "그" 이름을 언급하면 수사 및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그런 말이 계속 돈다고 했다. 나도 걱정이 되어 전에 톡방에 써놓았던 내 메시지를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덕분에 그날 친구들과 계엄령을 주제로 불이 났던 커뮤니티에는 주어 없는 욕설로 가득 찼다. 새벽 1시쯤, 다행히 국회에서 계엄 해제가 결의되고 국회에서 군인들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야 새벽 2시쯤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그날 밤, 아직 10대인 내가 가장 의아했던 점은, 대통령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비상계엄이라는 무시무시한 선언을 밤 10시에 기습적으로 선포했는가? 였다. 최근 위협을 느낄만한 국가적 비상사태가 있었던가? 종북 세력? 오물 풍선 때문에? 아직 나는 정치적인 영역은 잘 알지 못했지만,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한 이유 중 어느 것 하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계엄 해제가 빠르게 진행되어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내 친구들과의 단톡방 후폭풍은 거셌다. 계엄 해제 이후 친구들이 올리는 비난의 말들이 향하는 곳은 분명했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국회에 나가서 온라인바카라를 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대한민국의 한 국민으로서 온라인바카라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알록달록한 아이돌 온라인바카라
▲아이돌 노래 합창하며 탄핵투표 촉구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아이돌 노래를
아빠와 함께 온라인바카라를 나가기로 결정한 후, 가장 먼저 고민했던 것은 '촛불'이었다. 박근혜 탄핵 당시 부모님이들고 가셨던 촛불들은 이미 폐기된 지 오래였다. 촛불을 대신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싶었는데, 그때 한 온라인바카라 참석 인증 글에서 아이돌 응원봉을 들고 온라인바카라에 참석했다는 내용을 보았다.
나도 한때 슈퍼주니어의 팬으로 응원봉을 가지고 있다. '이런 걸 온라인바카라 장소에 가지고 가도 될까?' 처음에는 조금 고민이 되었지만, 속속 올라오는 다른 인증글에서도 응원봉들을 보니 용기가 났다. 그래서 12월 7일, 나는 슈퍼주니어 응원봉을 들고 온라인바카라에 갔다.
가는 길에 예상했던 대로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버스를 타면 숨 쉴 틈이 없었고, 걷고 있으면 사람들 사이에 눌렸다. 그래도 더 놀랐던 것은 이렇게 큰 규모의 온라인바카라에 질서가 잘 잡혀있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온라인바카라 현장의 한가운데로 진입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딱딱한 진행을 예상했으나 밴드들의 공연과 재치 있는 진행자 분의 말씀에 시간이 훌쩍 흘러갔다. 처음 참가하는 온라인바카라라 초반엔 눈치를 좀 봤으나 온라인바카라의 편안한 분위기가 내 응원봉을 흔들게 했다.
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힘
▲아이돌 노래 합창하며 탄핵투표 촉구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아이돌 노래를
첫 촛불 온라인바카라에 참석한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일어나는 젊은 세대들이 참 많구나. 국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지르면 86 세대(80대 학번 60년대생을 지칭하는 표현)뿐 아니라 그보다 젊은 세대도 반응하는구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모든 세대가 같은 생각을 하는구나!
이번 일은 세상 일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나 같은 10대 청소년들에게, 평소에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사태를 지켜본 모든 이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함께 힘을 모으는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식당에 갔던 누군가는 시위에 나갔던 다른 이의 밥값을 결제하기도 하고, 온라인바카라에 참석하지 못하는 누군가는 카페에 음료를 선결제하며 온라인바카라를 지원한다고 한다.
이번 사태는 분명히 불행한 일이지만, 온라인바카라에 참여해 보니 어쩌면 이 상황은 세대 통합까지 이루어 낼 것 같다. 온라인바카라에서 어른들은 이전엔 몰랐던 케이팝 가사들을 외우고 젊은 사람들이 든 응원봉에 대해 물어본다. 자식들은 부모님을 따라 온라인바카라에 가고 옛날 민중가요를 듣고 따라 부른다.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대통령의 탄핵'을 소리 높여 외친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결론이 날지 난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번 일은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남길 것이라는 점이다.
학교에서 교과서로만 배웠던 것을 온몸으로 체감한 '민주주의', 역사의 한순간에 함께 한다는 자부심. 정의와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안도감. 그런 것들을 느꼈다.
이 모든 것들을 가슴에 차곡차곡 채우며 난 다음 토요일에도 국회 앞으로 달려갈 것이다. 슈퍼주니어 응원봉을 들고.
▲9일 오후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를 포위한 가운데 ‘내란수괴 윤석열 즉각 탄핵 시민촛불’이 열리고 있다. ⓒ 권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