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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24. 2024

블랙잭 있으면 미운 낱자, '년'


지난 주말, 블랙잭그래피 2급 자격시험을 보았다. 캘리 시험에는 순수창작 글과 상업 블랙잭 글, 두 가지 유형이 제시된다. 평소 연습할 때도 전자보다 후자가 늘 신경 쓰였다. 왜냐하면 순수창작 글은 그저 배운 대로만 쓰면 되는데상업 블랙잭는 구조나 글자의 형태를 변형하는 예시가 많기 때문이다.


공방 선생님께서는 2급은 굳이 변형까지평가 기준에 넣지 않으니 신경 쓰지 말고 배운 대로 써도 된다고 하셨지만, 길거리 간판이계속 눈에 들어오살피게 되었다. 아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는데, 이 나이에도 아는 게 적어 세상이 달리 보일 여지가 많다는 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그간 블랙잭해 온 수많은 문구들 중 어떤 게 나오려나...긴장 반 설렘 반 받아 든 종이에 쓰인 글자 중 창작 문구는 비교적 평이했는데, 상업 블랙잭 문구를 보고는 눈이 똥그래졌다. 제시된 문구가,


'소년이 온다'


였기때문이다. 때론 글자도 무기가 될 수 있구나. 깊게 허를 찔렸다.


블랙잭캘리 자격 시험에서 이 제목과 다시 만났다. (사진 출처: 예스24)


한 달째 기상하자마자 제정신이 들기도 전에 한강 작가의 책3권-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작별하지 않는다-연달아 붙들며 매일 내 안에서 불구덩이처럼 솟아오르는 새로운 감정들몸서리쳤건만블랙잭 시험장에서 제목과다시 조우할 줄이야.


시험 전날, 캘리 선생님께서, "협회 사람들이 그렇게 바지런하진 않아요."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뜻이었을까. 제시 문구가 얼마나 전에 작성되느냐는 다른 수강생-1급 블랙잭을 준비하던 분-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이었다. 시험 문구가 대체로 시험일 직전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었다.


글귀를쓰는 필체를평가하는 블랙잭에크게이슈가 되는 작가의 작품 제목이 출제된 게 일견 타당해 보이면서도 전혀 예측 못한 문구를 블랙잭 시간에 만나니당혹스러웠다. 딸과 단 둘이 떠난 첫 해외여행길, 어리바리하다 올라탄 로마 지하철이 반대방향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처럼,일순멘붕이 왔다.


정신을 차려야 해. 문구는 생각 못했다 해도 낱낱의 글자들은 다른 문구에서 다 블랙잭했던 것들이잖아. 긴장으로 옴쭉해진 심장을다독였다. 시험 시간 2시간 동안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연습한 후 협회 도장이 찍힌 화선지 5장에 옮겨 적고 그중 잘 된 걸로 2장-한 장은 순수창작 글, 나머지 한 장은 상업 블랙잭 글- 제출하면 된다.


가만히생각해 보면 그리 난감할도 아니다.

아무리 잘 썼다한들,'어랑 참숯생선구이'나 '수타 짬뽕', '콩죽팥죽' 같은상업 블랙잭 문구가 마음에 쏙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에비하면'소년이 온다'는 얼마나 단아한문구인가.

그저 응당 있을 줄 알았던 것이 아닌 다른 것이 자리에있는 것을 지켜볼,그리고 그것을 바꾸기엔 내 힘이 너무 미약할 때 느껴지는불편하고 자꾸 신경 쓰이는 마음. 자리에 대한 고정관념 같은 것이었으리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시된 문구그대로는블랙잭해 본 적없지만 다른 문구들을 통해 각각의 블랙잭들은 이미 여러 번 써 본 것들이었다.'년'자만 제외하면.전에 이 낱글자를 블랙잭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놀랍다. 수많은 자음과 모음의 결합을 연습했는데 왜 이 글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을까.

낱소리로써의 시작 자음인 'ㄴ'과 자음과 받침을 연결하는 모음 'ㅕ', 받침으로써의 'ㄴ'의 형태를 숱하게 연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이게 조합된 글자 '년'은 처음이었다.

1시간 이상 계속 써이상하게 글자가 예쁘게 써지지 않아조금 열이 올랐다. 충분하다여겼던 2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내가 미숙한 탓이 크겠지만,붓글씨로 쓴 '소'와 '년'의 낱글자는 아무래도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지 않았다. 낭패였다.


'소년'이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데 '년'만 떼어내니 전혀 예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이게 욕이 되었나, 쓸데없는 글자 탓을 하며 쓰고 또 썼다.결국 맘에 들진 않지만 시간에 쫓겨 제출하고 말았다.아쉬워도할 수 없다. 세상엔 노력해도 안 되는 걸 아는 것도 지혜의 한 가지니까. 나중에 선생님께 써달라고 해서 다시 블랙잭해야지.예쁘지 않은 글자도 멋스럽게 쓰는 게 블랙잭그라퍼의 일이니까.


블랙잭 있을 때는 미약하적절한 환경을만났을폭발하듯빛을 내는 것들이있다.까만 어둠 속에 반짝이는 반딧불이처럼. 늘 그 자리에 있지만 사위가 어두워져야또렷이형상드러내는둥근달처럼.블랙잭 발음하면 거친 소리지만 좋은 상대(소)와 만나면 아름다운 단어가 되는 '년'이란 블랙잭처럼. 파울로 코엘료가 <다섯 번째 산에서 언급했듯, 비를 만나면 콸콸 넘쳐대는 계곡물이나 찬란하게 푸르러지는 식물들처럼. 흔들리는 영혼이 희망이나 믿음,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들을 붙드는 것처럼.


이토록 미미한 나를 끈끈하게 세상과 연결시키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가족과 친구, 일과 지금 관심을 두는 대상들, 책과 글쓰기,내가 얻는 것들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끊임없이배워도모자란세상 앞에 겸허해지는 마음에 대해.

그러니 오늘은 나를 둘러싼 것들에 좀 더 다정해야겠다. 더 고개 숙이고 낮아져야겠다. 나를 무엇이 되게 하는 소중한 그것들을 섬세하게 살피고 감사해야겠다.


시냇물이나 식물처럼 영혼에도 일종의 비가 필요한데 바로 희망, 믿음 살아가는 이유 같은 것들이다.
_ <다섯 번째 산,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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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마음에 집에 와서 다시 써봤어요. (캘리 by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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