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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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자와 모과 Dec 03. 2024

베짱이와 헬렌카지노

헬렌카지노


일렉 기타를 들고 템포 160으로(원곡 속도는 무려 172) 크라잉넛의 ‘좋지 아니한가’를 연습하던 남편이 지친 표정으로 소파에 앉는다.

방구석에서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해도 해도 안된다며 푸념을 늘어놓다 문득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방에는 나와 남편밖에 없기에 원치 않아도 나는 청자가 된다.


“ 옛날에 헬렌카지노 한 마리가 살았어.

그날도 눈을 뜨자마자 열심히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나는 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거지?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유튜브도 있고 게임도 있고, 잠을 더 자도 되는데 왜 힘들게 이러고 있지?

베짱이는 이유를 찾으려 길을 나섰어. 한참을 걷다 연못에 사는 개구리를 만났어.


개굴개굴 목청도 좋은 개굴아. 너는 왜 여름내내 헬렌카지노를 하니?

글쎄, 잘 모르겠어. 따뜻한 공기가 밀려오면 몸이 간질간질해지면서 저절로 헬렌카지노가 나와.

헬렌카지노를 부르다 보면 즐거워지고, 즐거우니 밤새 부르게 되고. 아침이 되면 피곤해져서 잠이 들고.

개구리와 헤어져 오솔길을 걷던 헬렌카지노는 풀잎 위에 앉은 귀뚜라미를 만났어.

귀뚤귀뚤 목청도 좋은 귀뚤아. 너는 왜 가을내내 헬렌카지노를 하니?

글쎄, 잘 모르겠어. 차가운 공기가 밀려오면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지면서 저절로 헬렌카지노가 나와.

헬렌카지노를 부르다 보면 위로가 되고, 위로가 되니 밤새 부르게 되고. 아침이 되면 지쳐서 잠이 들고.

나만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구나. 베짱이는 더 이상 답을 찾지 않기로 했어.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니까.

헬렌카지노는 들판에 앉아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어.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던 개미들도 음악에 맞춰 일하는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어.

햇살이 들판을 환하게 비추었어. 모두에게 보람찬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어.”



남편이 지어낸 동화를 듣다보니 다른 이야기 한 편이 떠오른다.

레오 리오니의 동화책 <헬렌카지노이다.


헬렌카지노은 들쥐다.

겨울이 다가오자 다섯 명의 들쥐 가족은 옥수수, 나무열매, 밀을 모으기 시작한다. 헬렌카지노만 빼고.

가족들이 묻는다.

“너는 왜 일을 안하니?”

헬렌카지노이 대답한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겨울이 되고 첫눈이 내리자 들쥐 가족은 돌담 틈새 구멍으로 들어간다.

겨울은 길고, 모아놓았던 먹이는 조금씩 사라져간다.

춥고 배고픈 들쥐들은 점점 지루해져간다.

그러다 누군가 헬렌카지노에게 묻는다.

“ 네 양식들은 어떻게 되었니?”


헬렌카지노이 대답한다.

“ 눈을 감아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네 마리 작은 들쥐들은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글을 쓰다보면 가끔 이걸 왜 하고 있나 생각이 든다.

써도 써도 문장이 나아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


헬렌카지노가 던진 질문에 답을 하자면,

모든 생명체의 마음 속에는 창조를 하고 싶은 씨앗 하나가 심겨진 게 아닐까?

누군가는 그 씨앗을 금방 발견해 물을 주고 자라게 한다.

누군가는 그 씨앗을 늦게 발견해 발을 동동거리며 싹을 트게 하려 애쓴다.

이미 늦었다고 씨앗을 버리는 것보다 되든 안 되든 싹을 틔우려 시도하는 게 낫다.

각자마다 가진 씨앗이 다르니, 새싹이 나고 자랄 때까지 그게 무엇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오늘도 묵묵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모으고 연습을 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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