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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꽃 Apr 10. 2025

죽지 못 할 이유가 고니카지노 살아진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고니카지노를 읽고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참담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의 이야기는 저자 본인의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책을 보며 자연스레 떠올랐던 장면은 영화 <쉰들러리스트와 <아름다운 인생 그리고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었다. 잔혹한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계속되는 삶과 그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때때로 삶이 전쟁터라고 느끼는 나에게도 영화는 충분히 위안이 되었고 처음부터 선과 악이 존재고니카지노 것이 아닌 우리는 그저 조금 더 운이 좋거나 나쁜 ‘보통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언제나 비범했다. 그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서문의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뻔하지 않은 화법이 마음에 들었지만 왠지 말장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과녁에 화살을 맞히듯 집중해서 성공만 바라보고 달려도 그 언저리에 닿을까 말까인데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니. 그즈음 사랑에 관한 글에서 사랑을 비누로 비유하며 잡으려 할수록 손에 넣을 수 없다 한 것과도 비슷하다 느꼈던 것 같다. 정설의 역설적 표현이려니 했다.


추상적인 목표는 방향만 있을 뿐 정확한 지점을 가늠하기 어렵다. 성공, 행복, 사랑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추상적인 목표를 향한 과정에는 수많은 구체적인 작은 목표들이 고니카지노. 우리는 그저 매 시점에서 Here & Now를 외치며 최선의 점들을 이어갈 뿐이고 점은 어느새 선이 되고 면이 되어 결국 ‘성공’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공간은 여백이 있어야 비로소 공간으로써의 구실을 하고 여백은 오직 개인의 창의성에 의해서 확보된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공간을 쫒는다면 어떨까?


먹고 자고, 본능에 충실한 삶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자신의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모든 사물의 가치는 재배치된다. 빵은 금보다 귀했고 잠을 못 잘 환경은 없었으며 심지어 몸은 스스로 아프지 않은 쪽을 선택한다. 인간은 집행유예 망상을 가졌지만 ‘가스실’이 고니카지노는 절망스러운 사실은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 이처럼 살거나 죽고자하는 의지는 결국 왜곡되고 처음 수용소에 끌려갔을 때의 충격, 절망, 그리움, 혐오감은 어느새 무감각으로 변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타인의 죽음에는 무감각해지지만 정작 사적인 모멸감은 죽음 이상으로 고통스럽다는 점이다. 왜일까?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 같이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니카지노의 계급사회


수용소에서도 계급은 존재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언제나 계급이 있고 역시 다양한 기준으로 재배치된다. 그리고 그 계급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계속해서 바뀌며 우리는 지위에 대한 불안을 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계급이 곧 생명 연장의 수단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인간에게는 분명 위대한 면이 고니카지노. 본능에 가장 충실한 것 같지만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진화한다고 생각한다.


매슬로우 5단계 욕구 이론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사회적인 존경을 갈구하고 마침내 자아실현을 꿈꾼다. 또한 현 단계에서는 기본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도 과거 상위 욕구 충족의 경험이 있다면 인간은 ‘다시’ 위대해질 기회를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 지위 획득의 과정이란 사회적인 욕구 충족 단계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삶의 태도’가 결정되는 순간으로 볼 수 있다. 자아실현 욕구로 가는 길은 결국 여기서 갈림길이 나뉘는 것이다. 어떤 선택이 보다 삶을 의미 있게 할 것인가?


본능적이지만 매우 영적인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고니카지노니!


수용소의 생활은 매우 본능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영적이다. 주검과 수프가 함께고니카지노 사람들은 냉소적임과 동시에 감수성에 젖기도 한다. 문화적 동면 현상이 있었지만 정치를 논의고니카지노 종교에 의지하며 그 와중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다. 오히려 바쁜 일상이라면 놓칠뻔했던 석양의 아름다움도 알아챈다. 굶주림과 추위에 고통스러울 때면 동물에 가까운 본성을 보이다가도 빵 한 조각으로 채워진 허기를 달래고나면 금세 지성과 의지 그리고 감성을 가진 인격적 존재로 거듭난다. 본능과 이성의 거리는 현실과 예술의 간극처럼 멀게 느껴지지만 정작 손바닥의 앞 뒷면이 아닐까? 희망이란 절망이라는 터널 끝 마침내 한 줄기 빛인 것처럼 말이다.


상대적 행복감의 크기


비슷한 고니카지노로 나는 수용소의 행복이 작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인간이 느끼는 절대적 행복이란 상대적 행복에 비해 낮은 기본값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디폴트를 불행으로 설정하면 오히려 상대적 행복감이 증폭되는 고니카지노이기도 하다. 수용소에서의 상대적 행복은 저자의 말처럼 쇼펜하우어의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행복에 가까웠다. 굴뚝 없는 수용소로 배치되고 이 잡는 시간이 주어지며 수프 그릇에 우연히 감자 조각이 떨어지는 기쁨, 심지어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 정도 말이다.


혹독한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카포의 주치의였던 프랭클은 그래도 운이 ‘조금’ 좋은 쪽이 아니었을까? 의사라는 직업은 공동생활을 하던 중에도 그에게 가끔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안겨주었다. 우스갯소리지만 그래서 옛 어른들이 뭐든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한 걸까? 비록 그 역시 최후의 갈림길에서 수차례 운명이 엇갈렸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테헤란에서의 죽음’을 예시로 희생된 사람들의 덧없는 삶을 묘사할 수 있을 것 같다.


놀랍도록 창의적인 고니카지노의 속성


고니카지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고니카지노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고니카지노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책은 수많은 회고록에 담긴 나치를 향한 저주나 수용소안 참담했던 환경만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특징이다. 비록 수용소에서는 기아에 시달리다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하지만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주거나 죽음을 앞두고 ‘정신적인 성취’를 얻게 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수용소안 모든 감시병들이 악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같은 동료 수감자를 괴롭힌 사람의 비열함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과연 한 인간의 자유 의지는 환경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을까? 시련과 죽음은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를 가질까?


우리는 누구나 그 어떤 순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본능적인 욕구에 충실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적인 상황은 존재하는데 나는 그것이 인간의 창의적 속성 덕분이고 생각한다. 이는 때때로 비현실적이라고 불려지며 언제나 놀라운 변수를 가져오는데 바로 자유의지로 얻어진 삶의 의미이다. 문득 책 속의 ‘슈타인호프의 도살자 J박사 이야기’가 떠오른다. 인간은 정신을 넘어선 존재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제 인물 오스카 쉰들러는 탐욕스러운 성향을 가진 부패한 기업가였고 단지 돈벌이를 하기 위해서 수용소에 갇힌 유태인들을 노동자로 고용한 것인데 결국 그가 삶의 의미를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데서 찾았다는 점은 무척 경이로운 일이다. 여담으로, 쉰을 바라보는 내 나이에도 사람이 밉지 않은 것은 비슷한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의미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왜 고니카지노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고니카지노.
-니체-


돌아보면 내가 심리학을 좋아하게 된 고니카지노는 매우 간단하고 간절했다. 나의 ‘미해결 문제’를 풀고자 함이었고 마침 접했던 스피노자의 말은 마치 ‘정답’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기 위해 심리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마치 보이지 않는 흙탕물 속의 ‘불확실성’과 같았고 마음공부를 하면서 뿌옇게만 보이던 흙탕물이 점차 가라앉는 느낌을 찾을 수 있었다. 결국 고통을 대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같았다. 살아야 할 고니카지노를 모르는 것은 왜 고통스러운지를 모르는 것과도 비슷하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고니카지노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스피노자 <윤리학-


심리치료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고 각각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중 정신분석이론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고통의 원인을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이라고 보며 성적인 욕구불만을 강조했던 반면 프랭클은 ‘실존적 공허함’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로 보고 이를 ‘로고테라피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정신분석이론이 과거 무의식에 대한 접근이라면 로고테라피는 미래지향적이며 덜 회고적이고 덜 자기반성적이라는 점에서 내담자의 부담이 적다고 생각한다.


또한 고로테라피는 긍정심리학처럼 인간의 잠재력을 믿고 문제 해결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는 관점이 다르다. 마지막으로 나는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정신의 역동성과 아들러의 열등감의 효능이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열등감은 인간 발전의 동력이 된다고 보는데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적당한 긴장감은 실존적 공허를 채우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적 공허는 실존적 책임으로 기인한다고 보는데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마지막으로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죽지 못 할 이유가 고니카지노 살아진다


3장에서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질문에 나는 비교적 빨리 나만의 답을 찾았다. 로고테라피에서 말한 세 가지 길 중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내게도 무척 중요했다. 어떤 시련은 예고 없이 들이닥쳐 피할 수 없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내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때는 그저 묵묵히 견디고 바라보아야 하는데 이러한 비극 속에서는 낙관적인 관점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고통은 24시간 내내
지속되지는 않았기에
참고 견뎠으며 아프지 않은 순간
밥을 먹고, 운동을 고니카지노,
산책을 했으며 친구와 수다도 떨었다.
- 김혜남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지난 나의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우연히 ‘비극 속의 낙관’을 찾아낸 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정신분석전문의 김혜남 선생님의 책을 통해서였다. 파킨슨병으로 대부분의 시간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그녀는 하루 24시간 중 단 몇 분이라도 낙관을 찾아내는 놀라운 체험을 한 것이다. 경험해보지 않는 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나 역시 그러했고 여전히 경험해 보지 못 한 것이 많다. 간절한 순간 떠오르는 건 삶의 의미가 아닌 죽지 못할 이유일 수도 있다. 그럴땐 죽었다 하고 살면 살아지고 살다보면 가끔 행복한 날들도 온다. 한편 책에서는 인간의 세 가지 비극을 ‘고통’, ’ 죄’ 그리고 ‘죽음’이라고 하였는데 내 경우 죄와 죽음에 대한 성찰은 아직인 것 같다.


그렇다면 빅터 프랭클에게 삶의 의미는?


그렇다면 빅터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찾은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내를 향한 영적인 사랑이었을까? 삶과 자유를 향한 끈질긴 의지였을까? 어쩌면 죽도록 피곤한 저녁 거친 두 손으로 수프 그릇을 감싸고 바라보는 해 지는 풍경이 아니었을까? 물론 이러한 결론은 그의 예고 없던 시련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는 수용소에서의 3년간의 체험을 통해 본능적이지만 영적인 삶을 경험했고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의외로 나는 삶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모호함을 점차 편하게 느낄 수도 있게 되었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이 한 말처럼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건 두렵지만 신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고니카지노. 나는 이러한 마음가짐이 일시적 임도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발란스가 맞는 찰나를 연결시키려는 최선의 노력을 할 뿐이다. 물론 그 역시 한 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고 이 역시 모호함이니 모호함을 견디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죽기 직전에 행복하다면야


나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존적 공허를 채우는 여정이다. 1. 주체적으로 사고하며 하고싶은 일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 2. 다양한 삶을 경험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나는 것 3. 피할 수 없는 시련이라면 그 안에서 최대한 행복한 것이다. 돌아보면 나를 죽이던 시련앞에서 내가 마주했던 건 살아야 할 의미가 아니라 죽지 못할 이유였던 것도 같다.


몇 해 전 봤던 프랑스 영화 <우아한 고슴도치 속 반전의 결말은 충격적이었으나 감동적이었다. (+ 스포 있음) 책을 즐겨 읽지만 제대로 된 교육 같은 건 받아본 적이 없는 건물 수위 아줌마 르네에게도 사랑이 오고 그녀는 보통의 데이트를 즐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멋진 신사 카쿠로 오주와의 만남으로 마침내 새로운 삶을 준비고니카지노 그녀는 어느 날 데이트를 앞두고 황망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는 결말이다. 이어 영화 속 3인칭 화자인 팔로마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중요한 것은 죽는다는 것도 아니고,
몇 살에 죽느냐도 아니고,
우리가 죽는 그 순간
무엇을 고니카지노 있었느냐이다.”
-영화 <우아한 고슴도치 내레이션-


‘겉으로 보면 가시로 뒤덮인 철옹성 같은’ 그녀는 ‘고집스럽게 홀로 있고 지독하게 우아한’ 작은 고슴도치였지만 죽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문득 죽음이 두렵지 않아졌고 삶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빅터 플랭클 <죽음의 고니카지노라는 책의 메시지를 대표할만한 문구를 옮겨와 봤다.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고니카지노.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그 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고니카지노. 그러나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고니카지노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고니카지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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