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신변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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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22. 2025

어른이란 ‘첫날의 짜침’을 견뎌내는 벳38

헛스윙 대신 홈런 치는 날을 기다리며

가끔 가는 꼬치구이 가게가 있다. (내가 사는 곳과 멀지만) 아파트 단지 근처 상가 1층에 있는 일본식 꼬치구이 집이다. 인근 회사 직장 동료들과 퇴근 후 한잔하거나, 가족끼리 함께 와서 아이는 구운 주먹밥을 먹으며 그림을 그리고 부모님은 꼬치를 곁들여 사케를 마시는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다. 명란구이, 천겹살, 닭 껍질 등 먹고 싶은 것만 골라 생맥주 한잔 곁들여 가볍게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이다. 늘 시작은 ’간단하게 한잔하자’지만 현실은 먹다 보면 하도 많이 먹어서 웬만한 고깃집만큼 가격이 나온다. (꼬치구이 집에서 식사하는 벳38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싶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늘 다찌석에 앉아 숯불로 꼬치 굽는 걸 구경하면서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게 일주일의 완벽한 마침표다.


벳38 굽는 직원(혹은 알바)은 일본 스포츠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이글이글한 눈으로 벳38를 굽는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처럼 짧은 머리에 빠른 손으로 숯불 위 벳38를 지휘하듯 현란한 손놀림으로 뒤집고, 옮기고, 가위로 탄 곳을 떼 낸다. 중간중간 소스가 담긴 항아리에 벳38를 통째로 넣다 빼서 양념 옷을 입히며 맛을 더한다. 그가 벳38 굽는 모습은 숯불 위에서 손으로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잔 동작 없이 빠르고 간결하다. 쉴 새 없이 벳38를 뒤집으면서도 여유가 느껴질 정도니 일정 수준 이상의 수련을 마친 숙련자가 분명했다. 기름과 소스가 떨어져 연기가 직원의 몸을 휘감을 때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노동’을 끝내고 피로에 찌든 몸을 맥주로 씻어내기 위해 꼬치구이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숯불대 앞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꼬치 굽는 보급형 강백호 직원(혹은 알바) 보다 느지막이 출근하며, 양손 가득 사 온 커피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던 매니저(혹은 사장)가 꼬치를 굽고 있었다. 보급형 강백호 직원은 휴무일인가? 아니면 퇴직한 건가? 이유가 궁금했지만, 조용히 입을 닫고 메뉴판부터 탐독했다. 메뉴를 고르는데 기본 안주인 양배추가 담긴 접시를 놓는 알바생의 얼굴을 흘깃 봤는데 신선하다. 꼬치구이를 제외한 기본 세팅, 술, 주방 음식 서빙을 담당하던 문신 많은 알바생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검은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하얀 얼굴의 20대 초반 어린 알바생이 일을 배우고 있었다. 크고 작은 손님의 요구를 혼자 판단할 수 없어 수없이 매니저에게 물어보고, 엉뚱한 메뉴를 주문서에 넣는 실수를 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잔뜩 긴장한 초식동물의 자태로 매장 보초를 서고 있었다.


같이 간 사람과 수다를 떨면서도 사라진 사람과 새로 온 사람의 동작을 유심히 살폈다. 숙련자와 초보의 차이 느껴졌다. 숙련자는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불필요한 동작을 하느라 에너지를 허튼 곳에 흘려버리지 않기 위해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반면 초보자는 부단하게 움직이는데 손에 쥐는 건 얼마 없었다. 손님이 말한 소주 브랜드를 잘못 알아듣고 다른 브랜드 소주를 가져다줘서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또 처음 탄산음료를 낼 때 얼음 컵을 같이 서빙했으면 됐을 일을 탄산 캔만 서빙한 후 다시 빈 컵 그리고 또 얼음을 채워 오는 헛수고를 했다. 자기 머리에 꿀밤을 콩 때리며 자책하는 알바생의 모습에 손님도 사장도 이렇다 저렇다 말을 더하지 않았다. 알바생은 일이 서툴러도 질책보다 침묵이 더 무섭다는 걸 아는 사람이었다.


돌이켜 보면 나도 그랬다. 초보 시절에는 뭐가 맞는지 몰라 수없이 선배들에게 묻고, 30분이면 끝낼 일을 종일 붙들고 있곤 했다. 마음이 앞서 괜히 움직였다가 두 번 세 번 일을 하는 건 다반사였다. 시간이 지나 일이 손에 익으면서 잔 동작이 줄었다. 점점 타율이 높아졌다. 헛스윙이 줄고, 안타를 넘어 홈런이 잦아졌다는 건 숙련자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다. 하루아침에 숙련자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초보 시절을 잘 견뎌야 숙련자가 될 수 있다. 못남, 찌질함, 무능을 견뎌내는 자만이 숙련자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남들은 쉽게 해내는 것 같은 일을 몇 날 며칠 끌어안고 있느라 자괴감에 빠질 때 첫날을 떠올린다. 입학 첫날, 출근 첫날, 요가 첫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첫날 등등 모든 첫날을 돌이켜 보면 뭐든 지금이 낫다. 그만두지 않는 한 첫날보다 후퇴할 일이 없다. 어른이란 ‘첫날의 짜침’을 견뎌내는 벳38이라고 했던가? 성인이면 뭐든 척척해낼 거 같지만 현실은 여전히 처음 하는 일은 헛발질이 당연하다. 포기하는 대신 ‘으른’이니까 수준이 모자라거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물을 안고도 첫날이니까, 처음이니까 ‘그럴 수 있어 ‘라는 말로 자괴감이란 수렁에 빠진 나를 끄집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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