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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an 10. 2025

우리는 보호받기에 카지노게임

"저희가 처음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도, 여러분들은 저희를 믿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보시는 것처럼 저희는 게임을 하고, 여러분에게 약속된 돈을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선 그런 저희를 믿고 모두 자발적으로 어떤 강압도 없이 이 게임에 자원하셨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1을 봤다면 사회자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그 사회자는 <오징어 게임 시즌2에서도 정확히 같은 말을 했다.


당신들은 그 어떤 강압도 없이 자발적으로 이 자리에 와 있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새 기회를 주고자 한다. 물론 지금도 선택은 가능하다. 게임을 포기하고 계속 빚쟁이의 삶을 살든지, 마지막 남은 기회를 잡든지. 역시나 포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로써 상호간의 계약은 완전히 성립했다. 이 게임이 온전히 당신들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됐음을.


다들 알다시피 이게 끝이 아니다. 선택은 여전히 매 순간 보장돼 있었다. 생존한 참가자들은 다음 게임의 참가 여부를 다수결로 결정할 수 있다. 높은 비율의 반대자가 있지만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따라 집단의사를 결정하기에 이 의사결정은 정당성을 갖는다.


즉, 참가자들 모두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도 이 게임의 진행을 결정했다. <오징어 게임 시즌1에서는 결국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 한 사람만 생존할 때까지 모든 게임이 진행됐다.


예속을 선택할 카지노게임는 존재할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두가 자발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예속을 선택했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이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민주주의 다수결 원칙으로 집단의 뜻을 정했다. 주최 측은 여러 번 숙고할 기회를 줬다. 그들은 선택할 카지노게임가 있었고, 그것을 행사했다. 모두가 평등하게.


도덕적으로는 불편할지언정 그 의사결정 과정엔 부당함을 논할 여지가 없다. 고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자기 지배 원칙'을 근간으로 삼았다. 쉽게 말해 자신들이 자발적으로 정한 규칙을 법으로써 준수하는 일을 말한다.


고대 직접민주주의 사회에선 모두가 자신의 뜻에 따라 공동체의 규칙을 만들고, 다수결 원칙을 거쳐 가부를 정한다. 이렇게 정한 규칙은 자신의 선택이기에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다. 스스로가 정했으니 부당함이 싹틀 여지가 없다. 그것이 곧 공동체 권력의 정당성을 만든다. 게임 참가자들의 의사결정 역시 이 원칙에 따라 이뤄졌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예속을 선택하는 행위를 자유라 부를 수 있는가?' 철학적 자유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치적 자유는 철학적 자유와 다르다.


정치학자 지오반니 사르토리는 "정치적 자유는 자유의 조건을 만드는 도구적이고 상관적인 자유"라고 정의한 바 있다. 따라서 참가자들의 선택을 철학적 자유로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논점을 흐릴 뿐이다. 정치적 자유는 개인이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와 조건을 따진다. 즉, 이 사람이 특정 권력과 위계, 그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인지를 본다.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 우리는 보호받기에 카지노게임


카지노게임ⓒ넷플릭스


사르토리가 정의한 정치적 자유에 따르면 게임 속 참가자들은 자유롭지 않다. 더불어 자유로운 선택도 아니다. 자발적 예속은 그저 예속일 뿐이다. 우리는 방종에서 예속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선택할 수 있기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기본권을 헌법과 법률로부터 보호받기에 자유롭다. 이 자유를 위해 국가의 권력행사는 철저히 제한된다. 이것이 정치적 자유다.


더불어 이것이 고대의 직접민주주의와 근대 입헌민주주의의 차이다. 근대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기본권은 천부적인 것이다.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매매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의 기본권을 돈과 맞바꾸는 경쟁은 그 취지와 전제부터 위법이다.


계약이 현행법으로 원천 무효인 이유다. 무슨 게임을 하든 카지노게임지만 타인의 기본권으로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참가자들의 목숨을 걸고 돈놀이를 하는 게임의 정당성은 이 지점에서 깨진다.


근대 입헌민주주의는 (사적인 개인부터 국가 권력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체가 동그란 보호막 안에 들어 있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각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다른 주체의 보호막을 터뜨리려는 시도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한 국가기관이 다른 국가기관의 보호막을 터뜨리려는 일도 마찬가지로 금지된다).


그렇지 않다면 타인도, 국가 권력기구도, 그 누구도 당신의 영역 안에 임의로 들어올 수 없다. 이렇듯 우리가 누리는 모든 법과 제도는 모든 주체의 권력행사를 제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 결과물이다.


카지노게임막이 깨진 사회에선 모두가 '오징어 게임'


한 달 전, 그 카지노게임막이 깨졌다.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수십 년간 지켜온, 그 카지노게임막이었다. 모두의 노력으로 세 시간 만에 계엄령은 해제됐지만, 야만과 문명이 찰나에 달려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오싹하다. 만약 계엄군이 국회 본회의장을 완전 점령했다면 개인들의 기본권을 지켜주는 카지노게임막은 영구적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가 왜 계엄령을 발동했는지 크게 관심이 없다. 권력욕 때문이었을 수도, 스스로가 만들어낸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 그보다 궁금한 건 대통령의 헌법파괴 행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의중이다. 사회의 카지노게임막이 모조리 파괴된 사회에서 무엇이 그토록 하고 싶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바랐든 찾아올 현실은 상상과 다를 것이다. 카지노게임막이 사라진 사회에선 힘을 휘두르는 자들 역시 쉽게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 사이에서 완력을 휘두르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오징어 게임 속 빌런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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