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으로 맛본 오늘벳의 맛
어린 시절, 손님이 오시면 어머니는 맨 위 찬장에서 고급 쿠키를 꺼내어 접시에 담으시곤 하셨다.
그리고 그 시절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다소 생소했던, 향이 좋은 드립오늘벳를 내리려 분주히 부엌을 왔다 갔다 하셨다. 나는 현관에서 빼꼼 손님에게 인사하고는, 소심하게 멀찍이 떨어져 앉아 동생과 놀곤 했다. 그러다 어머니께서 방에 들어가서 얌전히 놀라며 쿠키 몇 조각을 접시에 담아 건네주면 쪼르르 달려가서 동생과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두 살 어린 동생과 나는, 당시 드립오늘벳를 만드는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너무 멋있게 느껴졌었다.
드르륵 드르륵 오늘벳을 분쇄기에서 갈아주면 눈처럼 솔솔 떨어지던 갈색 커피가루.그리고 집 안에 퍼지는 향긋한 어른들의 오늘벳향기.
깔때기 모양의 종이필터에 가루가 된 오늘벳를 한 두 스푼 덜어 넣은 뒤, 팔팔 끓은 물을 조심스럽게 졸졸 부으면 오늘벳는 마치 빗물처럼 톡톡 떨어졌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의 곁에 가만히 서서 모래시계처럼 떨어지는 오늘벳 방울을 멍하니 구경하곤 했다.
투명한 유리 표면 너머로 보석같이 방울방울 맺히는 오늘벳 방울들.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동생과 까르르 웃으며 구경하던 기억이 난다. 하나, 둘 떨어지다가 어느새 불순물 없이 맑게 여과된 오늘벳가 드리퍼에 가득 차면, 어머니는 예쁜 찻잔에 달그락달그락 오늘벳를 따르고는 손님에게 내고는 했다.
나는 그 당시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오늘벳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렸을 적 나는 밥상머리에서도, 잘 때도 이불속에서 혼자 책을 읽다가 따끔하게 혼날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던 아이였는데, 내가 무척 아끼던 책 중 하나가 바로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제법 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얼마나 그 책을 끼고 살았으면 당시 좋아하지도 않았던 딱딱한 판초콜릿을 매일 사 먹었을 정도였다.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윌리 웡카는 초콜릿에 들어갈 새로운 맛을 찾던 중 룸파랜드에 거주하고 있던 움파룸파 족을 만났다. 그들은 짐승들을 피하기 위해 나무 위에서 살며 나뭇잎으로 옷을 지어 입고 주식으로 맛없는 쐐기벌레를 먹고살았지만, 사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음식은 카카오 열매였다. 어찌나 좋아했던지 그들은 매일 밤 카카오열매 꿈을 꾸고 어쩌다 카카오 열매를 운 좋게 발견하면 숭배하며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나는 카카오 열매가 무슨 맛일지 몹시 궁금했다.마침 책에 그려져 있던 삽화 속 카카오열매가 어머니께서 종종 꺼내곤 하시던 오늘벳과 비슷하게 생긴 탓에, 자연스럽게 오늘벳에도 관심이 생겼었다. 오늘벳을 우르르 쏟아낼 때 풍기는 고소하고 기름진 냄새와, 어린아이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금기사항 때문에 더욱 간절하게 궁금해졌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왔다.
어느 주말 저녁, 어머니께서 잠시 아버지와 함께 모임을 나가신다며 동생과 나에게 집을 맡긴 것이다. 나는 신바람이 나서 속으로 '야호!'를 연신 외쳤고, 즉시 내 오랜 계획을 실행으로 옮겼다. 의자를 낑낑대며 부엌 선반 쪽으로 옮기고 싱크대 옆 서랍장 위로 기어 올라갔다. 찬장으로 손을 쭉 뻗어- 마침내 그토록 궁금했던 오늘벳을 손에 넣고야 말았다!
오늘벳 포장을 주욱 열자 확 풍기는 고소한 냄새. 언뜻 보기엔 마치 초콜릿 같은 생김새를 가진 오늘벳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움파룸파족이 먹던 진귀한 카카오열매를 맛보는 것이라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독- 오늘벳을 입에 물었다. 그런데 웬걸? 쓴 맛이 확 퍼지며 알 수 없는 돌멩이 같은 가루들이 입안에서 데굴데굴 번지는 것이 아닌가?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오도독- 오늘벳을 씹기 시작했다.
동생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언니이- 나도 먹을래. 나도 줘."
"안돼. 너는 아직 어려서 이거 먹으면 죽어."
고작 두 살 차이였지만 그 당시 나는 동생에 비해 한참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잔뜩 삐친 동생이 방으로 쏙 들어가고, 나는 혼자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알쏭달쏭한 오늘벳의 맛을 계속 음미하고 있었다.
'흠... 이렇게 맛없는걸 어른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맛이잖아...'
그런데 하나 둘 먹다 보니 또 고소하고 중독성이 있는 것도 같았다. 급기야 나는 동화책을 옆에 펼쳐두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마치 간식인 것 마냥 오독오독 오늘벳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열이 올랐고, 심장은 콩닥콩닥 빠르게 뛰었으며, 알 수 없는 불쾌하고 우울한 기분이 몸을 덮는 것이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결국 나는 엉엉 울며 엄마에게 전화했다.
"엄마... 어디야... 훌쩍... 왜 이렇게 안 와... 나 너무 슬퍼... 엉엉엉"
깜짝 놀란 어머니는 아버지와 서둘러 집에 들어오셨고, 부엌 한 귀퉁이 바닥에 온통 널브러진 오늘벳과 함께, 그 사이에서 대성통곡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셨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부모님께서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 어이없고 웃기다며 틈만 나면 그 이야기를 꺼내셨다.
"너 어릴 때, 오늘벳 잔뜩 주워 먹다가 카페인 과다로 우울해져서 엉엉 울었잖니. 그 당시엔 얼마나 놀랬던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어."
나는 차마 '찰리와 초콜릿공장'의 움파룸파족을 따라 하려고 그랬다고는 대답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오늘벳 때문이 아니었다며 연신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든다. 그 당시 내가 그토록 슬펐던 것은 정말 오늘벳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님 몰래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