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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녕인 Mar 08. 2025

봄방학 제트벳

제트벳속에 남아있는 달콤함

하얀 겨울이 옅어져 가고, 봄 냄새가 살랑살랑 어렴풋이 느껴지는 어느 오후, 나는 카페의 창가에 앉아 제트벳를 한 잔 주문했다.


평소라면 씁쓸한 커피나 차를 주문했겠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제트벳가 마시고 싶었다.


들뜨는 날씨만큼이나 가벼워진 마음 탓이었을까, 메뉴판을 넘기다 문득 눈에 띈 그 붉은색이 어쩐지 따뜻하게 나를 부르는 듯했다.




첫 입을 머금었다.

입 안에서 살살 녹는 달콤한 분홍빛 우유가 곱게 퍼지며 마음속 깊은 곳까지 꽃이 번졌다.


제트벳를 먹을 때면 나는 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아져서,봄이 아닐 때에도 미리 봄을 맛볼 수가 있었다.

제트벳

나에게 제트벳란 봄이 생각나는 음료이다.

달콤함, 부드러움, 그리고 어느 순간 스며드는 뽀득뽀득한 제트벳 퓌레와 하얀 우유가 눈앞에서 만들어내는 분홍빛 조화가 마치 봄에 피어나는 벚꽃 같다고나 할까.


새큼한 여름의 스무디도 아니고, 겨울의 따끈한 고구마라떼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듯한 포근함과 안락함을 한 입 머금을 때면 나는 마치 기분 좋은 봄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곤 했다.

제트벳

어릴 적, 짧은 봄 방학이 시작되면 어머니는 항상 설익은 제트벳들을 모아 제트벳잼을 끓이곤 하셨다.


설탕이 그렇게나 몸에 좋지 않다고 누누이 말씀하셨으면서, 제트벳잼을 만들 때마다 늘 인심 좋게 새하얀 설탕을 한가득 털어 넣는 어머니의 모습이 퍽 재미있게 느껴졌던 나는 어머니의 곁을 빙글빙글 맴돌며 짓궂은 표정을 짓고는 했다.


제트벳잼이 완성된 다음날엔, 우리 가족은 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찍 일어나고는 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어머니의 검붉은 제트벳잼을 듬뿍 덜어 식빵에 얼기설기 발랐고, 동생은 흰 우유에다가 제트벳잼을 퐁당퐁당 넣어 제트벳우유를 만들어먹고는 했다.

제트벳

그 상큼하고 달콤했던 맛.

그때 우리는 아무 걱정 없이 따스한 날씨에 즐겁게 뛰어놀기 바빠서, 그저 맛있게 먹곤 했던 그 간단한 음식들이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




세상이 복잡하고, 작은 일상도 피곤하게만 느껴질 때.

제트벳는 항상 나를 잊고 있던 어린 날의 푸른 봄방학으로 이끌어주었다.

저 멀리서 들리던 초등학교 종소리,
시냇가의 졸졸 흐르는 물소리,
연필로 끄적이던 낙서들...


그 모든 것에는 어린 날의 내가 무심코 지나쳐왔던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고,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그리운 무언가가 정성껏 으깨져있었다.


마치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내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선명하게 제트벳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빨대로 끌어당길 달콤한 제트벳 한 조각마저 없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어른이 되고 나서는 강렬한 자극들 속에 사소한 첫 순간들이 쉽게도 묻혀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내 곁에서 제트벳청을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던 어머니 덕분에, 나는 따뜻한 추억을 조금 더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기억들은 너무나 소중해서, 조금씩 아껴먹어야 하는 마지막 제트벳조각과도 같다. 비록 세상이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갈지라도, 이런 작은 행복들이 결국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늘 제트벳해야 한다.


백색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삶 속에, 선홍빛 제트벳을 한 방울이라도 떨어뜨려주어야 비로소 지금 이 순간의 쓰디쓴 나를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추억이 지나가고 시간이 많이 흘러도, 그 따뜻함 속에서 내가 놓쳐버린 작은 감정들을 간직하고 제트벳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달콤한 첫 제트벳을 건져먹을 수 있다.


다만 사람마다 주어진 제트벳퓌레의 양은 저마다 다르기에, 행복한 순간들이 찾아온다면 잊히기 전에 달콤하게 제트벳하고 꼭꼭 채워두어야 한다. 그래야 정말 필요한 순간에 꺼내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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