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의 역사 들여다보기
‘장손’이라는 전통적인 제목을 보고,콜로세움 토토가구태의연하고 뻔한이야기일 거라는생각이들어서 처음에는 볼 생각이 없었다. 믿을만한 사람들이 좋은 영화라고 추천을해서 보았는데, 실제로 보니 아주 좋았다.
보통 영화는 개인적인 이야기이거나 사회적인 이야기 둘 중에 하나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삼대가 같이 사는 한 가족의 미시적인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살았던 거시적 사회의 단면도 엿볼 수 있는 입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감독의 자전적 요소 때문에 이야기도 아주 사실적이면서 흥미로웠다.
보여주기식이아니라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문화적인 의식들을 보는 것도 좋았고, 원경으로 찍은 향토의 아름다움까지 즐길 수 있는 수작이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상도 대구 근처의 시골에서 두부 공장을 하는 집안에는 삼대가 같이 산다.
종갓집으로,큰 한옥을 가진,지역에서는 부자 집안이다. 마침 제사가 있었고, 임신한 손녀딸까지 포함하여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총동원되어 제사음식을 만든다. 그래도 할머니가 학수고대하는 사람은 장손자 성진이다. 더위에 선풍기도 잘 안 틀다가 손자가 오자 얼른 에어컨을 틀 정도로 그녀의 손주 사랑은 대단하다. 제사상이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가득 올리고 제사를 지낼 때는남자 3대가 제일 앞에, 그 뒤에는 사위들, 맨 뒤에 여자들이 와르르 모여서 제사를 올린다.
제사 후 식사 시간에 집안의 문제들이 불거지며 분위기가 나빠진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두부 공장을 현대화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영화를 만드는 손자는 자신은 두부 공장을 이어받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밤이 되자 다리를 살짝 저는 콜로세움 토토는 화가 나서 술을 많이 마시고 술주정을 하며 물건을 던지기 시작하고,늘 그래온 것처럼 아들과 엄마는 콜로세움 토토에게 이불을 씌우고 움직이지 못하게 막고 할머니는 나중에 잠든 콜로세움 토토 머리에 베개를 받쳐준다. 다음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손자를 배웅하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삼거리까지 걸어 나온다.
그해가 다 가기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상을 치르기 위해 성진이 다시 내려오고 인자하신 할머니를 잃은 가족들이 다 슬퍼한다. 지역사회답게 꽃상여가 동네를 돌아 선산으로 운구된다. 그러나 얼마 후 부조금 봉투를 계산하는 곳에 모두 모여 각자의 조문객들을 세고, 갑자기 할머니가 동네 친목곗돈을 관리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큰고모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두부 공장 월급을 한 달에 100만 원씩 맡겼다고 한다. 두부 공장을 맡아서 하던 고무부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비로 쓰려고 맡긴 돈이라고 한다. 엄마와 아버지는 말도 안 된다며 일축하고 서로 싸운다. 이때 할아버지는 멀리 앉아서 모르는 척한다. 고모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집을 나간다. 그날 밤 고모가 지냈던 작은집에 불이 나서전소한다.
고모 방에 있던 불에 탄 사진을 들고 고모부 병원으로 병문안을 간 성진이, 아버지가 술이 많이 취해서 실수한 것 같다고 하자 고모는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불을 냈다고 한다.
슬퍼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잠자리에 누운 성진을 아들로 착각한 할아버지는, 6.25 때 공산군이 자신의 부모를 학살하고 불태웠던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간신히 도망쳐서 살아났고, 그들은그렇게 살아남은 집안이라고 한다. 자신의 아들은 판검사가 되기를 바라서 사위에게 두부 공장을 맡겼지만, 성씨가 다른 사위에게 공장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들이 민주화 운동 중 다리를 다치고 낙향하고 사위는 사고로 입원하게 되어 지금은 아들이 공장을 운영하게 된 것이다.
다음날 성진이 서울로 올라가게 되자 할콜로세움 토토는따라나와서손자에게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며 통장을 쥐어준다. 거기에는 십수 년 동안 매월 할아버지는 100만 원, 할머니는 불규칙하게 몇십 만원씩을 꼬박꼬박 입금한 거래 내역이 적혀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성진의 얼굴이 복잡하다.
배웅을 마치고 돌아가던 할아버지는 삼거리에서, 집이 아닌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휘적휘적 산을 향해 올라간다.
여러 이슈가 입체적으로 들어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젠더 문제로, 여성들이 남성들과 불평등한 상황에서 차별을 받는 것이다. 제사 때제일 앞에 서는 남자들은 다 놀고 있는데여자들은 임신해서 배가 많이 부른 손녀딸까지 마루에서 계속 전을 부치는 장면도 있고, 두부 공장일은 사위와 손녀사위가 다 하지만 결국 아들에게 사업체를 물려줄 생각을 한다. 현재도 손녀사위가 실질적으로 모든 일을 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손자 성진에게 물려줄 것이 뻔하다. 대대로 되풀이되는 일이다.
분위기를 볼 때 아들은 대학 교육을 시켰으나 딸들에게는그러지 않은 것으로도 보인다.
제일 심한 것은, 딸이 고생해서 번 돈을 맡았다가 손자에게 줄 생각을 하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큰고모는 자신의 엄마가 돈을 관리해 준다고 했지만 통장조차 만들지 않았고, 아버지도 상황을 알지만 모르쇠로 일관하자, 절망하여 친정과의 인연을 끊고자 한다. 부모가 과거에 별로 돈이 되지도 않는 작은 집을 그녀에게 주었었는데 그 집을 태움으로써 친정으로 돌아갈 다리를 불태워버리며 분노를 표출한다.
격변하는 근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시대의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할아버지는 부모를 공산군에게 잃었으니 빨갱이라면 치를 떨게 되었고, 어떻게든 대를 이어서 집안을 살리겠다는 생각만가득하다. 자손들은 그런 할아버지 덕분에 태어났으니 그가 핏줄에 연연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콜로세움 토토도 시대적 상황(민주화 운동)으로 불구가 되고 꿈도 좌절되었으니 실패자가 되어 술에 절어 살며 주정을 하는 것을 가족들은 당연히 받아들인다.
손자 성진은 신세대로, 가업인 두부 공장을 이어받을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의 꿈인 영화 만드는 일을 열심히 하려해도자금도 경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기 때문에, 겉으로는 무관심한 척하지만 집안의 대소사에 꼭 참석하고 장손 노릇을 하고 있다.
겉으로는이렇듯남자 3대가 이 집안을 이어가는 듯 보이지만, 자상한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집안은 예전 같지 않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통해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소명 이외에집안 전체를 아우르려는생각이 없다.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사랑과 따뜻한 공기가 맴돌던 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엄마와 아버지는 고모가 거짓말을 한다며 비난하고, 고모는 집안과 절연하고, 할아버지도 모든것을 장손에게 몰아준채 자신의 세대는 이제 물러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집안사람들을 뭉치게 하고 따뜻하게 만든 것은 제사의례나 3대를 걸친장손들이아닌,할머니의 존재였다.
나의 개인적인 희망에불과할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오래 사셨다면 나중에라도 고모에게 목돈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사랑을 받고 자랐고 새로운 세대인 성진이, 할콜로세움 토토로부터받은돈을 어떻게든 고모와 나누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해 본다.
요즘 세대들은 보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제사 의례나 제사음식 등이 자연스럽게 소개되었고, 화장 문화가 되어서매장도 보기 어려운 이 시대에 꽃상여 운구 장면까지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골의 경치를 롱샷으로 비춘 장면들이너무 아름다워서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떠오르기도 했다.
사랑과 미움이 교차하는 가족의 긴 역사를사회의근대사와 교차시켜 훌륭하게 직조한 감독의 솜씨가 놀랍다.